다무다무. 앙크르.

  서걱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네 일상인가.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으나 납득하기는 힘든 구석이 있었다. 나는 너의 태도와 전장의 너만을 고대했다. 너로서의 내가 지닌 마지막 기억들은 대체로 날붙이나 감흥없는 흑백 화면에 불과했기에 전사되어 그대로 이어붙인 필름 같은 이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제서야 너와 나 사이엔 일상적인 대홧거리가 퍽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네가 나의 대답들을 알고 있는가는 모르겠으나 나는 확실히 너의 대답들을 알고 있다. 너는 오전 6시에 일어났고 오전 7시에 출근했으며 17분 즈음 지나치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가장 값싼, 얇은 햄쪼가리가 든 역겨운 빵을 역겹다 생각하면서도 배를 채우기 위해 꾸역꾸역 입에 처넣었다. 그리고 은행으로 가 대출 상담 따위를 돕고 점심을 굶은 뒤 늦은 저녁 귀가해 끼니를 대신할 커피를 내리고선 만들어서라도 가져온 서류철을 책상 위에 펼쳐 펜을 든다. 꼴사나운 염탐조차 없이 내 기억 속의 네 생활이었다. 너는 변화를 싫어하는 녀석이니 아마 지금도 그렇겠지. 다만 무엇인가 많이 달랐다. 안타리우스를 나온 뒤, 너는 어떻게 지냈지? 몇 번 입속에서 굴리던 그 질문을 시치름하니 감춘 채 묻는다.

  "벨저 홀든과 이글 홀든은 어떻게 됐지?"

  시린 분위기를 일세하듯 턱 아래 낀 깍지를 굳은 어깨와 함께 풀어내며 내뱉었다. 내리깐 시선 속 검은 정장 위 드문드문 네 하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으나 굳이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나는 네게서 재미를 보지도, 그렇다고 제법 눈물겨운 반쪽의 재회를 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대가리를 깨뜨리며 신이 나게 싸우지도 않았는데 네 흔적이 내게 남아 있다니. 내가 이 곳을 걸어 나가 네 모든 기억을 지우고 안타리우스로 돌아간다 한들 현재가 없어지지 않는다니. 너는 잠깐 싱둥겅둥 당근을 자르던 손을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뒤돈다. 경멸에 찬 바그라진 시선이 내 미간에 즉각적으로 떨어진다. 그 어설픈 증오에 숨이 가빠왔다. 너는 네가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게 있어 불가해한 영역이다. 너의 미움은. 신기하지.

  "네가 부를 이름들이 아니다."

  "너도 알잖아? 녀석들은 제법 걱정할 가치가 있는 녀석이야."

  "너와 그들은 아무 관계도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너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네가 쥐고 있는 칼을 휘두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하는가를 고민한다. 아, 그래? 내가 내 동생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해주지? 빈정대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꺼내지는 않는다. 네가 남았군. 부지중 입밖으로 중얼대자 너는 정말 검을 빼 들 표정이다.

  너는 홀로 지내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있었음에도. 몸을 일으켜 네 뒤로 다가가 목덜미마저 결벽한 허연 셔츠 깃에 손을 뻗어 접힌 부분을 펼쳐내자 너는 오한이 이는 듯 한 번 어깨를 희미하게 떨었다. 불쾌하다는 뜻이다. 이런 곳에서 고상하게 말 한 마디 없이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다. 허. 기가 차 한 번 조소하곤 다시 늘어지듯 소파에 뉘인 몸을 한 번 옆으로 굴려 시선을 협탁 위로 향했다. 재미없긴. 손을 뻗어 엎어진 액자의 조임새를 더듬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액자였으나, 이 아래 무엇이 있는지는 안다. 너의 어린 시절이다.

  나는 그저 네 날갯죽지 아래서 스쳐가는 과도기가 행복했다. 배양기 속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목검을 쥔 채 휘두르던 어린 너였고 아우들에게 단내나는 과일을 밀어 양보하던 너였고 회초리 자욱이 선연한 허벅지에 분한 듯 입술을 깨문 채 숨 죽여 이불 밑에 은닉하던 너였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엔 네가 없었다. 나는 네가 본 풍경들을 답습하며 타의에 성장했다. 나는 네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해하지 못했고 너는 그것이 어찌 되었든 그런 나를 증오한다 표출한다. 내가 너의 기억을 훔쳤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몰랐다(모체들은 그런 부분에 있어 생리중인 계집년들처럼 민감하기 짝이 없었다). 혹은……

  눈가를 데우는 뭉근한 열기가 여전하다. 기분은 제법 유쾌하지 못하다. 나를 알지 못하는 너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로서 대강 6만 시간이 넘어가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기대했던 것보다는 제법 잘 참았네. 눈을 굴리며 네 뒤통수를 말끄러미 노려보다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장하군.

  "이봐, 자아에 적대적인 성실한 노동자 씨, 오늘은 좀 기분을 푸는 게 어때?"

  결국 액자를 들추지 못한 채 요리를 하는 네 뒤통수를 향해 내뱉는다. 네가 나를 한 번 더 돌아본다. 여전히 대답은 없다. 네 표정은 금방이라도 까슬한 머리카락을 잡아채 좆을 물리고 싶을만치 선정적이지만 분노를 성욕으로 돌려 돋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식욕에 관련된 문제기도 하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문 밖에 서 이틀을 굶어야 했다. 그 즈음이면 내가 '네' 잘난 동생들 중 하나인 이글 홀든 정도라도 알기 마련이다: 너는 나를 알고 있고, 나를 명백하게 피하고 있었다.

  그럴 거면 아예 이 땅을 떠났어야지. 아름다운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숨 죽인 구렁이들을 베어내고 살갗을 지져 재생 불가하게 만들었어야지. 맛적은 흥얼거림이 절로 튀어나온다.

  "네가 널 만나 기분이 엿같은 건 알겠지만 오늘은 널 강간하러 온 게……"

  "……그만!"

  그리고 네 외침. 그럴 이유가 없었음에도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너는 네 이마를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짧은 머리카락이 굵직한 손가락 새로 우시시 억세게 비져 나온다. 제발 그 입을 다물어라. 부탁이다. 그 말이 주는 어폐에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부탁? 네가? 별 일이군. 여상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그 절박함에 푸슬푸슬 마른 웃음이 튀어나왔다. 만성적인 두통이 다시 밀려오는 듯 두어 번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너는 눈을 뜬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마치 너 자신에게 필요한 문장처럼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다:

  "너는, 내가 아니다."

  그래, 나는 네가 아니지. 당연한 얘길 당연하지 않게 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어디 또 있을까.

  "너와 같은 유전자에 네 첫 몽정이 둘째 동생에게 강간당한 다음 날이었다는 것과 네 유서가 든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지만 나는 네가 아니지, 다이무스 홀든."

 네 살갗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리고서야 너는 내가 네 앞으로 다가온 것을 알아차린 듯 싶었다. 그리고 너를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내가 아니지. 손을 뻗어 네 양 뺨을 쥔다. 광대 위 십자로 난 흉터의 질감은 여타 피부와 다르게 오돌토돌했고 약간은 민들했다. 목덜미를 타고 각진 어깨를 지나 네 팔꿈치를 더듬던 손이 마침내 네 손을 감쌌다. 억지로 쥐어잡은 그 손을 들어 쥐인 음식물 찌꺼기가 묻은 민날을 왼뺨에 가져다 깊게 짓누른다. 금세 시큰한 감각이 밀려왔다. 고기를 써는 감각이다. 우스운 것은, 내 손바닥 속 너의 손가락이 여즉 이 껄쩍한 식칼을 놓지 않은 채 목숨줄처럼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는 내가 바끄럽나? 네 모든 추악함을 모다 격리시킨 내 몸뚱어리가 저주스러워?"

  손등으로 뺨을 훑어 계속해 흘러내리는 핏물을 훔쳐냈음에도 제법 깊은 곳을 건드린 모양인지 지혈이 되지 않았다. 제대로 그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너와 같은 십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네가 나를 분필로 그어둔 문짝 만큼은 기억을 해주겠지. 날을 쥐어 네 손에서부터 식칼을 앗았다. 바지 안으로 단정히 넣어 입은 네 셔츠를 밖으로 끄집어 내 피가 묻은 날을 닦아냈다. 시뻘겋게 젖어든다.

  "무슨 짓……!"

  "이번엔 네가 닥쳐, 다이무스 홀든."

  부탁이니까. 그러자 너는 입을 다문다. 허리를 숙여 네 배에 고개를 묻은 뒤 붉게 젖은 셔츠에 얼굴을 닦아냈다.




앙크르ANCRE. 이것저것 더 적고 싶었는데 글이 안 적혀서 다 잘라냈더니 기분이 묘하다! (ㅠ-ㅠ ) 7월 다 가기 전에 그래도 하나라도 적으려고 했는데 결국 8월이 되어버렸다. 사이퍼즈 한도가 풀렸으니 이제 그랑블루나 애들 입혀줘야겠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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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벨저. 가학.

#

  "생각보다 뼈라는 건 촘촘해서."

  벨저 홀든의 검이 다이무스 홀든의 손등을 꿰뚫는다. 확장된 동공과 코를 통하지 못한 채 입으로 토해지는 밭은 숨에서는 후끈한, 체온 이상의 비이성이 신열처럼 들끓고 있었다.

  "이 정도로 헐거워지지는 않아, 다이무스."

  검자루를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리자 검날이 살갗을 빠져나오는 대신 신경이 끊겨 늘어진 팔이 고깃덩이처럼 도축되어 검신에 달려 올라온다. 시린 대리석 바닥에 코를 처박은 다이무스 홀든은 한쪽 팔을 그리 들어올린 채 끊어질 듯 호흡했다. 풀린 눈이 허공을 향한다. 그 말인 즉슨, 벨저 홀든을 향하고 있지 않다. 벨저는 검에 꿰인 다이무스의 손등을 제 두 손으로 쥐었다. 바닥이 대리석이었던 탓에 날이 손바닥을 꿰뚫지는 않은 모양이다. 천천히 그 손을 쓰다듬고 입 속에 손가락을 머금었다. 두어 번 타액으로 범벅이 될 만치 다이무스의 마디를 핥아낸 벨저는 한 손으로 다이무스의 손바닥을,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검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세게 밀어넣는다. 끼긱이며 걸거치는 쇳소리를 낸 날이 손바닥을 꿰뚫고 반대편으로 튀어 나왔고 벨저의 손가락 끝에 날의 번들대는 선단이 닿아왔다. 이 모든 감촉을 음미하듯 눈을 감은 채 미소 지으며 시를 읊듯 다이무스의 귓가에 속살댄다.

  "검이 한 자루 더 남은 것 같아."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손바닥을 깊게 검신에 마저 꿰어 넣는다. 다이무스의 어깨가 발작하듯 움찍한다.

  "어떡하면 좋을까, 다이무스."

  그의 손등이 마침내 검자루에 걸려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된 지경에서야 벨저는 손에 가한 힘을 풀어냈다. 퉁하는 소리와 함께 쨍한 검신의 소리가 들려온다, 다이무스 홀든의 오른손이 바닥 위로 추락한다. 벨저는 질끈 닫긴 그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까 뒤집으며 드러난 흰자에 입 맞췄다.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어깨를 쥐어 바닥으로 내리 누르는 손길이 마치 어린 아이를 누르듯 했다.

  "형, 아직 잘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참을 수 없는 희열이 마침표마다 뚝뚝, 더는 붉어질 수 없을만치 낭자했다. 날은 다시 한 번 애가지 같은 왼 뺨 위에 생길을 내며 피를 뿌린다. 대칭적이네. 마음에 들어. 옥깨문 입술은 보랏빛으로 물든다. 어젯밤처럼. 오늘도.


#

  경보음처럼 울리던 파도가 수챗구멍으로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내내 추억하던 네 머리카락 한 줌이었다. 책꽂이의 악단은 연주되는 일조차 없이 등한시 되었고 너 또한 피아노의 줄에 손가락이 베여 한참을 싸물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조차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웃고 말았다. 자고 있지 않잖아. 너는 추궁했다. 맞아, 안 자고 있으면서. 너 또한 추궁한다. 부어오른 목구멍이 쓰라려 입 속에 고인 침을 삼켜낼 수가 없었다.

  "우릴 사랑하지 않아?"

  너희가 잔망스럽게도 웃었다. 정해진 대답을 인지하고 있는 탓이다. 내 대답을 너희가 알고 있는 탓이었다. 너와 너, 그리고 나. 나는 자주 혼란을 겪는다. 

  "때리지 않을게, 정말이야."

  그와 동시에 손등의 도드라진 뼈로 너는 내 뺨을 내려 찍었다.

  "많이 아파하지 마."

  그리고 나긋한 목소리로 너는 비뚤어진 내 고개를 바로해주었다. 눈 뒤편에서부터 시큰하고 축축한 것이 꿀렁이며 흘러내렸다. 반쯤 벌어진 입술 새로 찝찌름하고 비린 맛이 느껴졌다. 인중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피라는 것을, 턱에서 방울져 허벅지 위로 흘러내리는 붉은 것을 보고서야 알아차렸다.

  "입술을 다물어 볼래? 침이 흐르잖아."

  너는 우습게도 나를 타박했다. 너는 조심스럽게 엄지로 내 턱을 훑어 훔쳤고 입을 맞춘다. 입 속에 고여 있던 피가 섞인 타액이 네 목구멍을 타고 꿀렁이며 넘어갔다. 벨저. 네가 불만스럽게 내뱉었다. 얼굴을 때리다니, 경박하구나, 이글. 그러자 네가 한숨처럼 답했다. 네 입술이 붉었다. 비강에 괸 핏물이 자꾸만 기도로 울컥울컥 넘어만 갔다. 입 속을 쑤시는 손가락이 목젖을 건드렸고 토기가 치밀었다. 나는 그러나 기침했다. 폐부를 들어낼 듯한 고통과 함께 혓바닥 위로 자꾸만 핏물이 터져 나왔다. 네 하얀 머리카락에 점점이 붉은 꽃이 피었다. 하지만 네가 보는 화원은 나와 조금은 다른 것 같았다.

  "파란 꽃이 피었네."

  네 손가락이 불구하고 내 광대 위를 더듬는다. 알싸한, 근육을 짓누르는 형태의 고통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예뻐. 벨저 너는 중얼거렸고. 예쁘네. 이글 너 또한 속살였다.




RT 감사합니다! 손에 관통상, 입가의 터진 상처, 코피, 헛구역질, 각혈, 뺨에 칼자국, 피멍 적었으니 남은 건 탈골, 골절상, 화상, 물고문, 만신창이네요…… (^ㅡ^ )…… 두 번째 글은 예전에 홀든즈로 적고 싶어 남겨놨던 조각글로 적었습니다(마른 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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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다무. 기면.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결여된 이래 드문드문 머릿속을 포화한 문장이 있었다. 이런 날 죽어본다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질까. 잠시간 그렇게 뇌까리고서도 별다를 것이 없다는 걸 알았다. 어둠살이 내려앉은 눈그늘에 히카르도 바레타는 유리창을 외면한다. 모 꺾어 뉘인 몸은 어느샌가 관짝에 처박힌 것처럼 활동하지 않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바레타는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그 사실을 잊은 듯이 내뱉었다.

  다이무스 홀든이 살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죽어 있다. 생청붙이며 이어나가는 생각들에 결손된 논리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혓바닥 위에서 죽어버린 이파리가 된다. 히카르도 바레타가 다이무스 홀든을 원망하지 않았다 허위였으나 그 사실을 곱씹으며 홀든의 이름자를 새기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체 눈을 가리고 끊어지는 듯한 홀든의 호흡에 연명해주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이무스 홀든은 잠들어 있었다. 그는 간헐적으로 눈을 감은 채 앞뒤로 까딱이며 햇빛을 향한 해바라기처럼 바레타에게 고갯짓했다. 영영 잠든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가끔 그는 눈을 떴고 히카르도 바레타를 응시했으며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물 한 잔과 부족하지 않을 만큼에 조금 못 미치는 음식을 입에 댄 뒤 다시 눈을 감았다. 처음 한두 번 이후의 이상에 바레타는 그의 어깨를 쥐었으나 병적인 기면으로부터 다이무스 홀든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평화롭고 순종적인 가사상태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눈을 뜨면 마치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듯이 무릎 위 얹어진 책을 한 장 넘겼다. 너무 오랜 기간 같은 장에 짓눌려 고정되고 만 책은 엄지로 책등을 눌러펴야만 배를 드러냈다. 점점 느려지는 초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시간은 유보되어간다.

  바레타는 그런 다이무스의 발치에 꿇어 앉은 채 그의 무릎을 벴다. 애당기는 그늘이 다이무스 홀든의 목에 드리우면 입술이 말랐다. 바레타의 이빨이 다이무스 홀든의 손톱 가를 씹었다. 그리 강하지는 못한 죽은 피부는 똑하는 소리와 함께 두쪽으로 갈라졌다. 끝을 물어 벗겨낸다. 켜켜한 껍질이 까지고 손톱 밑의 여린 살이 드러났다. 살점이 함께 떨어져 나간 것인지 붉은 피부 위에서 피가 맺혔다 손톱 가의 골 새에 고인 후 느릿하게 흘렀다. 금세 수분기에 우글우글해진 검지는 시뻘겋게 젖어들어간다. 여즉 애리한 얼굴에 작은 안도가 깃든다. 살아 있는 거다. 살아 있어준 거다. 바레타의 손이 피가 낭자한 그 검지를 훔켜쥐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다이무스 홀든의 손가락을 머금는다. 손가락에선 짠내가 났고 피에선 어딘지 희석된 쇳물이 흘렀다.

  그는 가문을 살잡기 위해 살던 남자였다. 그 사실에서 제 가치를 절감하던 장남이기도 했다. 태생적으로 여섯번째 손가락 같던 히카르도 바레타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무지한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이무스 홀든은 바레타에게서 바레타를 찾았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들의 관계는 포폄하기에는 이성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색사에 있어서도 단순한 언사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꺾어 움켜쥐는 것을 사랑하던 시기였다. 뿌리 잃은 남자에 욕정하던 계절이기도 했다. 비슷해지는 것도 더러워지는 것 만큼이나 쉬웠다. 다이무스 홀든의 혈관 속 증식하는 벌레는 다리가 없다. 초눈이 기는 죽음은 언제나 참도 가까웠다.




  향 언니가 준 '바레다무, 손톱을 물어뜯다' 키워드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실 새벽에 좀 손을 보고 추가적으로 붙임말을 더했어야했는데 그때 솔직히 너무 잠이 와서 정신이 없었던 것…… 사실 지금(19일 오후 12시 3분)도 잠에서 깬지 10분도 안 지났다(ㅎㅎㅎ) 요즘 참 정직한 시각에 일어나는 것 같다. 글에 논리가 없는 걸 보니 여전히 손에 붙지 않는 것 같긴 하다……


1) 다이무스가 기면증보다도 극심한 병을 앓았으면 좋겠다. 비슷한데 정말 목숨까지 깎아가며 잠에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눈이 뜨이면 뭔가를 먹고 반 페이지도 읽지 못할 책장을 넘기며 자신이 현실에 있다는 것을 허벅지 꼬집듯 깨달았으면 좋겠다. 근데 그 병이 바레타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바레타는 자신이 다이무스 홀든에게 있어 기생충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을 시정할 생각은 없다. 다이무스 홀든이 죽든 말든 단기적인 행복에 현재로선 눈이 멀었다. 뒷내용을 쓴다면 바레타는 다이무스 홀든은 조금 더 끔찍하게 아끼는 내용으로 조금 다르겠지만 일단 현재로선 그렇다.


2) 다이무스 홀든은 꽃이 한 철 피고 지는 것처럼 죽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느 순간엔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멈춰 있는 시계처럼 죽어간다. 초침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해 위아래로 자주 까딱인다(그 고개처럼). 사람들은 알람이 울리지 않는 걸 자신의 수면 탓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정말로 그는 그리 외치는 법을 잊고 행동을 하나하나 할 때마다 에너지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다이무스 홀든은 평생 이런 잠을 자본 기억이 없는 남자고 비록 간헐적인 기상에도 정신이 혼미하니 졸음이 쏟아지지만 이런 다디단 수면에서 깨어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에 중독되었으면 좋겠다. 기면증을 떠나 수면 중독 같은…… 몸이 고장을 위해 준비된 그런 느낌적 느낌.


3) 요는 바레다무 행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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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저다무. 수선화. 꽃갈피.

  다이무스 홀든은 자신이 그 꽃을 꺾었다는 것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모가지 꺾인 꽃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이 그 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단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젖은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자꾸만 말려 내려가는 스타킹을 끌어 올리며 벨저 또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어머니가 강박적으로 손질해온 정원을 좋아했지만 그 중에서도 정원에 앉아 시체처럼 피어있는 수선화를 더 좋아했고 그보다는 (비록 인정할 일 없었으나)그 정원 속에서 수선화를 동공에 피운 다이무스를 더 좋아했다. 벨저 홀든의 눈 속에서 피는 정원은 언제나 푸른 물에 잠겨 일렁였는데, 다이무스 홀든은 달랐다. 그의 정원은 언제나 눅눅하게 내려앉은 시대의 눈이 그득한 잿빛이었다. 약간은 거무죽죽한 빛깔의 무릎 위 얹어진 두터운 책은 사락대는 소리를 내며 넘어갔고 다이무스 홀든의 코끝에 누런 수선화가 닿았다.

  다이무스 홀든에게 처음으로 꺾인 꽃. 손바닥은 꽃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벨저 홀든은 자신이 벗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저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감정들은 더는 그를 쫓아오지 못한 채 양산형 공장의 벨트처럼 멀리 객관적인 실체를 옮겨가는 것처럼 보였다. 불구하고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웃을 수가 없었다. 그건 꼭 그들과 같았다. 똑 닮아버린 선망처럼, 다이무스 홀든은 벨저 홀든이 제게서 멀어져 가는 것을 본다. 벨저 홀든은 다이무스 홀든의 발소리가 그렇게 부서지는 것을 알았다.

  그 감정에는 가치가 없었다. 그에겐 사랑을 한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러니까, 조금은 꼬아 말해, 언제나 그렇듯이 감정은 계절 같았고 그마저도 알음알음한 학습으로 막연히 이것이 사랑인가에 대해 찻물이 식을 간극을 고민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지금보다 어렸던 때, 다이무스가 저를 까마득히 내려다 보았던 때를 떠올린다(그는 여전히 다이무스 홀든보다 작은 키였으나,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 무렵의 벨저 홀든은 변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소년의 '성장'이 아니었고 그리 달가운 징조 또한 아니 되었다. 어린 소년은 제 형의, 근육이 적당히 잡힌 종아리가 앞뒤로 움직이는 것을 뒤에서 응시했다. 일 인치 정도 잔디 위에 떠 있는 목검의 날에도 또한 시선이 갔다. 그럴 리가 없었음에도 도둑 고양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모욕스러웠다. 하지만 벨저 홀든은 다이무스의 시선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때의 감정을 잊게 된 것은 아니었다. 펼친 책 속의 꽃잎은 수분기 없이 너무도 취약해 보여서, 손가락을 대는 순간 잘게 바스라질 것이 명정했다. 그 누구도 벨저 홀든에게, 그리고 다이무스 홀든에게 이 꽃의 이름을 아느냐 묻지 않았으나 기억을 조금만 더듬어 올라가도 까칠하게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심어진 혈육의 뒤통수를 응시하던 어린 소년의 선망 어린 시선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공기가 빠져나가고 틈없이 맞붙은 두 얇은 판 속의 마른 꽃잎을 본다. 박제하기 위해 발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흔적이란 어쩔 수 없이 말단에서부터 천천히 갈빛으로 시작되었다. 밤도 낮도 안녕하지 못한 일부 속에서 벨저의 손가락이 다이무스의 손에 들린 종잇장 같은 꽃잎을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나비의 날갯장처럼 가루 난 추억과 함께 꽃갈피 또한 파스락대며 스러졌다. 꽃잎 가루가 남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다이무스의 입 속은 깔깔하게 말라 붙는다.

  이 작은 꽃 한 송이 정도는 그를 위해 괜찮아도 좋았다




  슬럼프인지 플라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쪽이든 도모지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아 트위터에서 키워드와 커플링 제시를 부탁드렸어요. 키 님, 키워드와 커플링 정말 감사합니다! (ㅠ0ㅠ ) 신경전처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적고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도저도 아닌(마른 세수)


1) 개인적으로 수선화가 짓눌려 책의 해당 장에 싯누런 꽃물 자욱이 있으면 좋겠네요. 너무 불친절하게 적혔고 저 또한 제가 무어라 적고 있는지 감이 잘 안 잡힌다. 다이무스가 부지중 꽃을 꺾었으면 좋겠다. 가끔 아, 예쁘다, 라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손이 먼저 나가는 그런…… 그래서 꽃을 꺾고 본인이 당황했으면 한다. 그걸 벨저가 꽃갈피로 만들면 좋겠다. 다이무스는 그 사실을 알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사실 적고 싶었던 건 그걸 바스라뜨리는 벨저였는데…… (우울)…… 벨저는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부정하려 들었으면 좋겠다. 자존심의 문제였으면 한다. 다이무스는 그게 한편으로 안타깝고 불구하고 벨저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은 없고 여하튼 눈치게임처럼 아니면 존나 철벽남처럼 꿋꿋하게 모르는 척 했으면 좋겠다……(마른 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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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저다무. 엿새. 열나흘.

  그가 돌아온지 엿새가 된 낮이었다. 이글은 다이무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검게 변색된 머리카락과 희게 탈색된 동공이 꼭 백조들 새로 떨어진 까마귀의 꼴 같다 탁자 위 그를 마주하며 벨저 홀든은 시게 웃었다. 상처받은 표정 하나 짓지 못한 채 다이무스 홀든은 벨저의 왼 뺨을 비켜 응시했다. 그는 두어 번 입술을 뻐끔대며 색색이는 숨을 내뱉다 이내 닫고 말았는데, 스프는 여즉 줄지 못한 채였다. 다이무스는 가끔 식탁 위를 더듬었다. 벨저는 손을 뻗어 다이무스의 스푼을 탁자 아래 숨겼다. 그러자 그는 두어 번 더 탁자 위를 더듬다 더는 손가락조차 꿈지럭대지 않게 되었다. 인형처럼 앉아 자신과는 유리된 식기의 달그락대는 소음들을 들으며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는지 벨저는 상상할 수 없었으나 썩 흥미가 있지도 않았다. 다이무스 홀든의 검은 머리카락이 도리질과 함께 천천히 흔들렸다. 그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단 한 번도 취약하다 생각해본 기억이 없는 맏이었다. 아버지의 분에 찬 고함 소리와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아직까지도 느른히 귓구멍에 들러붙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이무스는 어땠지. 함께 울었던가. 턱을 괸 채 짓무른 방울 토마토를 포크로 찍으며 벨저 홀든은 눈을 굴렸다. 퍽, 하고 진물 같이 누런 과즙이 터져 나왔다.


  그가 침묵을 앓게된 지 열나흘이 된 밤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였을는지 알 수 없다. 홀든 가에 돌아오기 전, 언제부터 그가 말을 하지 않게 되었는지. 벨저는 침대에 누워 제법 희극적인 상상을 했다. 이를테면 ‘그’ 다이무스 홀든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제 방으로 뛰쳐들어오는 따위의 망상이었다. 때문에 똑똑, 하는 노크 소리에 때문에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말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을 밀어 열고 들어온 것은 아우다. 이글, 무슨 일이야. 짜증스럽게 내뱉은 말에는 체온이 없다. 하얀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어깨 위로 떨어졌다. 실례잖니. 이글 홀든의 한 손에 들린 허연 베개 커버는 아무렇게나 구겨져 작은 손 안에 말려 있다. 벨저는 창을 때리는 채찍비와 머나먼 곳에서 점멸하는 번개에 시선을 잠시 두었다. 저런 게 무서우니? 그럴 리가. 이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래? 번개가 쳤다. 이글의 뒤로 시커멓게 늘어진 그림자가 졌고 그는 한참을 머뭇댔다. 자고 있지 않았음에도 시간을 방해 받았다는 것에 짜증이 일어 벨저가 나가라 일갈을 한 순간에서야 이글은 용건을 얘기했는데, 정확히는 용건보다는 꼭 보고 같은 단 한 문장이었다: 다이무스가 울어. 벨저 홀든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울어? 울어. 다이무스가 운다고? 이글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몰라. 이상한 소리가 나. 방엔 안 들어가봤어. 한나를 부르는 게 나을까? 품에 그러 안고 있던 베개는 어느샌가 카펫과 마찰해 끌려 있다. ……야냐, 어린애가 아니잖아. 가서 자. ……응. 벨저의 다그침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벨저 홀든은 오래도록 이글이 사라지고 굳게 닫힌, 유려한 백합이 음각된 제 허연 방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희미한 틈으로 빗살쳐 들어오는 촛불의 일렁임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다시금 창밖을 응시한다. 여전한 폭풍우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다이무스의 억눌린 울음소리를 상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벨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또 천천히 걸었다. 복도의 끝에 있는 다이무스의 방문 앞에 서 똑똑, 이글이 제게 그러했듯 두 번을 두드렸다.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무가 우는 소리를 이글이 착각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호기심이 인 것은 사실이다. 맨질하게 닦인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문은 쉬이도 열렸다. 벨저는 고개를 내밀어 다이무스 홀든의 공간 속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 둥글게 부푼 등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갔다. 다이무스. 움직임도 대답도 없었다.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걷어냈다. 다이무스. 하얀 이불 밑에서 젖은 눈으로 헐떡이는 제 혈육. 볼썽사나운 입술로 울음을 삼키는 저 동물. 벨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스몄다. 다이무스, 울어? 침대의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쳐 허리를 숙여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골라 떼어냈다. 수축한 동공이 정처없이 경련하고 호흡이 가빠온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이무스는 몸을 더 곱쳐 만다. 벨저의 손가락이 잠옷 새로 드러난 골 깊은 쇄골을 더듬었다.




  새우 님이 말씀하신 유아퇴행 다이무스 보고 싶어서 쓰다가 잘 생각해보니 이거 빼박 이다벨인데 빵을 나눠먹는 형제애를 시전하기에는 우리 애기들이 너무 어린 것 같아서…… (^-^ )…… 오……


1) 안타리우스에 납치 되어서 머리카락은 검게 물들고 언어와 시력을 잃은 어린 다이무스가 보고 싶다. 벨저가 그걸 짓누르고 억압하는 게 무척 보고 싶은데…… 정신적 충격으로 퇴행하면 제가 참 좋아합니다…… 근데 사실 다이무스는 퇴행을 한다 쳐도 되게 조숙할 것 같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타인의 손을 기다려야하는 그 상황 자체가 다이무스를 무력하게 보이게 만들어서 제법 좋아한다.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순수한 모습이 보고 싶다.


2) 다이무스 홀든이 다이무스 홀든이 아니게 된지 스무아흐레가 지난 새벽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떴다. 눈을 감았다. 세상은 한결 같이 시끄러웠다. 참도 오래 앓아 혓바닥을 움직여 법을 점차적으로 잊어가고 있었다. 홀든 가의 믿음직스러운 첫째였으나 동시에 너무도 어린 겨울이었다. 척추에 꽂힌 바늘에서 투명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울혈로 얼룩진 몸뚱어리는 축하게 시들어 빠져 더는 삼켜내던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3) 사족을 덧붙이자면 다이무스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탁자 위를 더듬어 스푼을 쥐려고 했던 건데 벨저가 기민하게 엿먹이려고 스푼을 숨긴, 그런… 아마 스푼을 쥐었어도 스프를 떠먹지는 않았을 것 같다. 흘리는 게 혐오스러워서. 아마 엄청난 연습 끝에 가족과 같은 탁자에 앉는 상상을 하지 않을까, 다이무스라면. 한나는 저 날 이후 다이무스에겐 스프를 주지 않았다. 다이무스도 함께 식사를 하려 하지 않았고. 안타리우스에서 돌아온 이후 초반엔 괜찮았지만 점점 퇴행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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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벨저. 온실.

  이상스럽게 뜨순 볕이었다. 유리를 투과해 들어온 양광에 좁은 유리정원은 후텁하게 달아올랐다. 함뿍 젖어버린 천이 등 언저리서 들러붙어 쉰내가 유난했다. 이글 홀든은 그렇게 눈을 떴다. 부시었다. 무지갯빛으로 산산조각 나 무엇인가 그의 시야 속으로 파스스 떨어졌다. 꼭 유리만 같아 눈을 질끈 감았으나 얼굴에 닿아오는 것은 없었다. 거짓말 같은 햇빛이다. 두 팔로 바닥을 짚은 채 이글은 몸을 일으켰다.  대리석으로 짜인 바닥 위 손가락을 문대자 허옇던 김이 묻어난다. 질끈 올려 묶었던 머리카락이 한동안 누워 있었던 탓인지 느슨히 목덜미 께로 내려와 있었다. 한나의 빗질은 퍽 포근하다.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택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검지 손가락을 걸어 머리끈을 풀어내자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떨어졌다. 퍽퍽하게 더운 숨 탓인지 금세 뒷덜미와 뺨에 척척히 가닥 져 들러붙는다. 채 녹이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입 속에 담아둔 사탕이 여즉 도록도록 구르고 구부정하게 수그린 등에 그늘이 졌다. 손가락만으로는 더는 꼽을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노닐었으나 이글 홀든은 그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아직도……

  그러고 있을까.

  눈을 굴린다. 한심하다는 생각은 했다.

  흰눈을 떠 덩쿨이 감긴 온실의 입구를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다이무스 홀든이 저 문을 열고 그를 향해 구둣굽을 또각이며 걸어들어올 것만 같았다. 혹은 벨저 홀든이 크라바트를 매만지며 자신을 다그치고 화를 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리 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다이무스 홀든이라면 시간을 고를 것이고 벨저 홀든이라면 이글 홀든에게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마주한 푸른 눈에 서린 고양감에, 인정한다, 이글 홀든은 한 호흡 간 벨저 홀든의 죽음을 상상했다. 그의 멱살을 쥐어 사냥하기를 바랐다. 다이무스 홀든은 소리가 없었다. 꺾인 꽃의 성대는 거세되었다. 이글은 온전하고 기적적으로 홀로가 되었다. 도태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너무 거창했다. 그런 치레를 통해 진정 '도태'될 자신을 원치 않았다.

  그는 유화처럼 찐득하고 이후엔 굳어져 거칠게 뺨에 와닿는 꿈을 꾸었다. 졸음이 부옇게 그의 망막을 훑어올렸다. 데구르르 굴러 온실의 구석에 처박혔다. 손바닥을 짓누르자 뜨끈한 유리에는 김이 서렸다. 호 하고 온기를 불어넣으면 천천히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의 기억도 그랬다. 목소리를 잃은 단편적인 벗은 등과 흔들리는 다리가 떠올랐다. 곱쳐진 발가락과 뒷덜미를 거머쥔, 굳은살이 박힌 커다랗던 손도 그곳에 있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굴어도 몇 번이고 침대의 프레임은 계집애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이글은 천천히 가열된 유리 위로 뺨을 댄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입술을 내리 누른다. 벗겨진 입술이 시큰하게 쓰려온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며 이마를 찧었다. 속눈썹은 유리와 함께 느릿하니 녹아내린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뻐끔댄다. 쩌억쩌억하고, 눈을 끔벅이고 입을 다실 때마다 그런 소리가 났다. 구르며 입 속으로 들어찬 머리카락들을 질겅이며 씹어댔다. 침으로 범벅이 되어 엉긴 것이, 한나에게 좋은 소리를 들을 순 없을 성 싶었다. 

  벨저의 옆모습이 꼭 이랬다. 땀에 엉겨, 찰랑이던 가닥은 뭉쳐 빳빳한 기색을 비친 채. 그는 자신의 혈육을 범하며 몇 번이고 거슬리기 짝이 없다는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다이무스의 얼굴 위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허벅지를 그러쥔 손에 등이 아린 것인지 다이무스는 더욱 앓았다. 정말로 그는 아파보였다. 그리고 그 표정은 낮은 시선에 참도 바다 같았다. 오스트리아는 내륙이었고 이글 홀든에게는 손에 쥐고 놀 수 있는 것들이 충분했기에 그는 그 짠내가 흐르는 물에 얼굴을 담근 적이 없었으나, 꼭 바다 같은 감정이었다. 이글의 생각은 거기서 잠시 끊어졌다. 그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해초나 물고기 따위가 있을 것이다. 가끔은 죽은 사람이 떠다닐 거고 고래가 물을 뿜은 뒤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터다.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억울했고 때문에 더욱 심해에 가깝다.

  "모르는 척 해줄게."

  그리고 그가 그곳에 놓여져 있었다. 다그치기 위한 오브제처럼 혹은 장난질 이후 뛰어들어온 부엌의 탁자 위 과자 한 바구니처럼. 그는 오랫동안 가만했다. 가니메데스의 분수 물줄기를 하나 건너 그를 마주한 이글은, 버겁게 숨을 내뱉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데굴 굴렀다. 그의 손이 한 움큼 홀든의 이름자를 쥐어 마른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짜증스러운 얼굴이었다. 퍽퍽했다. 그는 얼마나 이글을 찾아다녔을까. 과연 헤매기는 했을까. 적당히 기른 머리카락이 젖어 가라앉았고 우글우글하게 지문에는 주름이 졌다. 자신이 얼마나 이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는 아무 것(식물은 볼썽사납게도 취급되지 못했다)도 없다. 탓에 익숙해졌던 온실의 풀비린내 틈사구니로 상쾌한 파우더내가 섞였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마지막이야."

  이글은 내뱉었다. 이글 홀든은 엄지와 검지로 작은 틈을 만들었다. 벨저의 작은 머리통은 좁은 시야 속에서 그 새에 딱 알맞게 들어찼다. 똑, 하고 비틀면 뚝, 하고 뽑혀나올 것처럼. 무심하게 이어지는 아우의 목소리에 벨저는 잘게 웃었다. 그는 침대 위 여즉 할딱대고 있을 다이무스 홀든을 떠올렸다. 그는 지독하게 행위를 염오했으나 동시에 일탈에 탐닉했다. 시트 아래 종잇장을 깔아 정액이 시트에 스미는 것을 막을 만큼 꼼꼼했으나 동시에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다이무스 홀든과 제가 씹질을 그만두는 일은, 당분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돌하기 그지없지. 어쩜 이렇게 커버렸는지.

  "그건 협박이니, 이글?"

  졸졸졸. 잔뜩 날을 세워 제게 다가오는 것들에 민감했던 이글은 마침내 분수의 소리를 들었다. 분명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는데, 분명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알아 차리는 것은 지독히도 늦었다. 이글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금전까지의 상냥함을 거짓으로 치부하는 괴괴한 긴장이 감돌았다. 협박이 아냐. 그는 침묵으로 그렇게 답했다. 경고지. 벨저의 눈이 곱게 접혀 사라졌다. 저런.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는 어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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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다무. 정사.

  바레타의 팔이 젖은 홀든 그러 안는다. 깍지를 낀 손이 풀려 셔츠 위 도드라진 척추를 쓰다듬고 골반을 더듬었다. 이 모든 향에 도취되어 천천히 바레타의 입술을 물었다. 부패해 절단해낸 그의 새끼지의 한 마디가 자라지 않은 지 두어 주가 흘렀다. 그리고 그의 두 발이 뭉그러져 제 꼴을 하지 못하게 된 지 서너 일이 지났다. 다이무스 홀든은 애써 그의 상처들을 응시하지 않으려 애썼다. 바레타는 특별히 그 사실에 대해 비참해 하거나 자괴하는 일 없이 일상을 이어갔다. 차이보다는, 서로의 준비라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가까운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애써 연명하는 것에 있어 바레타는 진즉 회의적이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고 계제적으로(결과적으로는), 죽을 것이다. 세상은 바꾸기 힘든 사실과 바뀌지 않는 사실: 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차라리 단순해 쉬운 이치다.
  바레타가 홀든이 더는 자신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지한지는 퍽 오랜 시간이 흘렀다. 불구하고 바레타가 다시 한 번 그 부탁을 내뱉지 못했던 것은 사날없던 홀든의 곪은 시선, 그리고 고저없으나 전후로 요동치는 그들 새의 기류 탓이기도 했다. 바레타의 어깨 너머, 개먹은 의자의 가죽은 허옇게 일어나 있다. 홀든은 습기가 찬 제 뒷목을 떠올린다. 바레타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의 힘을 풀곤 홀든의 목덜미에 더욱 고개를 묻었다. 투미한 애새끼처럼 이빨을 새워 몇 번이고 잘근대던 그는 마침내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소루한 애무에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겼던 살갗이 찢겨 나간다. 삼키고 삼켜 어느 순간부턴가 응어리가 되어버린 단어가 홀든의 피와 함께 바레타의 밖으로 튀어 나왔다.
  "다이무스."
  분명 바로 자신의 곁에서 속삭여진 이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든은 그것이 도모지 저의 이름 같지가 못하다. 꼭, 묵음처럼, 죽어버려 혓바닥 위에서 녹아 사라진 양.
  "날 죽여다오."
  아.
  다이무스 홀든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희게 물들어 가는, 바레타의 등에 얹어진 자신의 두 손을 응시한다.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 끝으로 물방울이 뚝뚝 방울져 흘러내렸다. 히카르도 바레타는 홀든의 손 안에서 가라앉는다. 사랑했으나, 오간 것은 돌려 받지 못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솔아버린 상처 아래 갖힌 진물처럼 다이무스 홀든은 여전히 미동없다. 그의 눈 속에 바레타는 없다. 나를, 죽여다오. 바레타는 혹 그가 듣지 못한 것이 걱정된다는 듯 다시 한 번 내뱉는다. 다이무스 홀든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바레타를 바라본다. 회백질을 닮은 시선이 인중을 콧대를 타고 올라가 눈을 마주한다. 바레타의 옷깃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얇은 천 아래의 살갗에 손톱을 제겼으나 단정히 깎인 손톱으로는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바레타의 등에서부터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바레타의 입가에는 알짝지근한 미소가 걸린다.
  "죽여다오."
  그는 한 번 더, 이번에는 자신의 핏물과 함께 내뱉었다. 죽여다오. 죽여줘. 홀든, 다이무스 홀든. 나를…… 나를 죽여다오. 홀든의 어깨에 딱딱하게 힘이 들어갔다. 바레타는 얇은 살갗을 찢고 장기를 해치는 태도에 허허로이 웃었다. 파아, 하고 날숨을 뱉으며 키들대면 입술과 코에서 피가 울컥 터져나왔다. 날은 점점 더 앞으로 밀려난다. 깊숙하게, 그들의 가장 밑바닥까지. 히카르도 바레타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앞으로 서서히 무너진다. 그러나, 이내, 그의 얼굴은 푸르게 얼어간다. 뜨끈한 것이 맞댄 뺨 새로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고, 눈을 감은 채 입을 다문 다이무스 홀든을 좁은 시야 너머로 응시한다. 태도의 자루로부터 떨어져내린 다이무스 홀든의 손이 대롱대롱 허공에서 흔들렸다. 그는 눈을 뜬 채 자신을 응시하는 처연한 연인을 본다.
  "홀든."
  바레타는 제 등 뒤로 손을 뻗어 검자루를 쥔다. 짓누른다. 흉곽 속 살아 숨쉬던 구더래기들을 짓이긴 날이 다이무스 홀든의 등짝을 마저 꿰뚫었다. 홀든. 그는 이상의 단어들을 떠올릴 수 없었다. 함몰되어가는 안방 너머서도 붉은 기운이 몰려왔다. 바레타는 고개를 비틀어 다이무스의 뺨을 쥐었고, 뜨인 그의 눈을 마주하며 혓바닥으로 홀든의 입술을 두드렸다. 쉬이 열린 입술 새로, 차마 삼키지 못한 뜨끈한 피가 끊임없이 주르르 쏟아진다. 바레타는 그 위로 자신을 겹쳤다. 검붉은 접문. 여즉 홀든의 뜬 눈을 감기지 못한 채였다.

 

 

 

심중정사. 동반자살. 믹향 님의 (8-8 ) 같은 검으로 자살하는 다이무스와 바레타 썰에 신나게 죽으며 썼습니다. 곱고 예쁜 썰 풀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믹향 님. 믹향 님 금썰 동네방네 소문 내고 싶은데 제가 말재주가 없다…… 믹향 님~! 사랑해요~! 이거 적는다고 한국 시각 기준 오후 10시까지 다 못 적으면 까까 보내겠다고 했는데 어찌저찌 적었네요(방방)

 

1) 바레타를 관통한 다이무스의 검이 천천히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어 다이무스의 흉곽을 부수고 바레타는 이미 죽어버린 다이무스에도 불구하고 손을 뻗어 기어이 검을 관통시키는 게 보고 싶었는데 뭘 적었는지 모르겠다. 다이무스가 죽는 순간 끝까지 입술을 벌리지 않았는데 바레타가 죽은 다이무스에게 키스하기 위해 입술을 맞대고 혀로 헤집으면 그 순간 입 속에 고여 있던 피가 주르륵하고 끊임없이 쏟아졌으면 좋겠다. 바레타도 서서히 죽어가겠지…… 뭔가 말이 줄줄줄 이어지는데 어감이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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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무스. 제노사이드.

  샬럿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저를 감싸고 있던 물방울 건드렸다. 손가락 끝이 맞닿은 부분부터 부서지듯 허물어져 내린 수벽은 이내 그녀의 발밑 웅덩이가 되어 사라졌다. 안개 속, 그녀는 버려졌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유기한 것이다. 어린 몸뚱어리를 찢으려 든 얼음 결정은 이제 녹아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샬럿은 숨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신체의 핏물이 출렁인 듯 균형이 잡아지지 않았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쏟아내린 빗물이 우비 자락 새로 자꾸만 스미었다. 겹겹이 옷을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빨이 따그닥 부딪칠 정도로 공기가 시렸다. 먼 곳에서 포탑이 탄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철거반 노동자들의 단말마가 희석된다.
  명정하게도, 이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샬럿은 제 목을 더듬었다. 오돌토돌하고 얼룩덜룩하게 변했을 것이 뻔했다.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자 폐부가 떨려오며 밭은 기침이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흐르는 끈끈한 눈물을 우비 아래 옷소매에 문질러 닦았다. 다이무스 아저씨는? 아저씨는 어떻게 됐지? 아저씨는? 나는? 난 어떡해야 좋아? 죄였던 목에 쿨럭이며 기침을 토해내고서야 그가 떠올랐다. 분명, 내동댕이 쳐지고 살갗을 찢기던 순간 두렵던 이들의 사이로 빛나던 검은 다이무스 홀든의 것이었다. 도망쳐라. 핏기 없이 허연 입술이 뻐끔댔고 샬럿은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그 누구도 자신을 찾을 수 없도록 자신이 살아 남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물이 찰랑찰랑 들어찬 장화를 질퍽이며 눈을 감은 채 달렸다.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기 위해 튀어나간 손이 그녀의 우비 모자를 스쳤고 척추를 타고 흐르는 공포는 안구 뒤편까지 다달아 그녀의 숨을 죄였다. 검이 맞부딪히며 쨍강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등 뒤에서 이어졌다. 그녀는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푸른 머리카락이 울고 있었다. 그러자 더는 누구도 그녀를 쫓지 않게 되었다. 다이무스 홀든을 죽여 취하는 이득이 그녀를 죽여 취할 수 있는 것들에 견줄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샬럿은 몸을 일으켰다. 망설임은 없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딘가 거세게 부딪혔던 것인지 머리 한쪽이 쎄하게 아려왔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리 있을 수는 없었다. 만약…… 만약 다이무스 홀든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자신이 비를 뿌려 아군들이 그를 구하러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살아, 있다면.
  주머니 속에 짤랑짤랑 든 주화들을 샬럿은 안개 속으로 던졌다. 들이붓다시피 한 스프린터에 목구멍이 쓰라렸다. 마지막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그를 도울 수 없다. 샬럿은 작은 보폭으로 건너편, 다이무스 홀든이 있을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퉁이 너머서 숨 죽여 들려오는 소리들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바람이 불면 빈 파이프들이 연주하듯 울었는데, 그 소리를 무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쿠션을 켜기도 여의치 못한 상황이었다. 샬럿은 느릿하게 상자 새로 몸을 숨기며 걸음을 옮겼다.
  안개 사이로 어슴한 사내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거친 호흡이 들려왔다. 코로 공기를 가쁘게 들이마시는 소리와 거칠게 입술 새로 목구멍을 긁고 튀어 나오는 날숨은 꼭 조각칼과 같아서, 다이무스 홀든의 폐부 가장 깊숙한 곳에 생채기를 냈다. 피구름은 검날 끝에서 피안화처럼 피어 올랐다. 시선 아래 하얀 손톱 밑이 검게 변해갔고 흙바닥이 초콜릿처럼 녹아 녹진하게만 변해간다. 안개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샬럿은 하얗게 굳어졌다. 뭔가 물컹이는 것을 밟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내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후끈한 비린내가 콧속으로 달려들었다.
  "다이무스 아저씨."
  몇 번이고 불결한 체액을 뒤집어 써도 그의 태도는 언제나 결벽하게 빛났다. 털어내는 순간 흩뿌려지는 핏물이 그의 까칠한 뺨에 점점이 안착한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훑어내 고양이의 그것 같은 혀 끝을 대어본다. 녹 슨 못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났다. 붉은 눈에서 여지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분수처럼 퐁퐁 솟아나오던 눈물은 이내 속에 쌓인 모든 것을 토해내듯 더욱 거세졌다. 다이무스를 바라본 샬럿은 마침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장화 아래 짓눌린 물체를 확인했다. 손톱이 단정하게 손질된 팔 하나. 그녀의 뺨이 위액으로 둥글게 부풀었다.
  "다이무스 아저씨."
  보글보글하고 거품이 이는 소리에 다이무스는 검을 든다. 그리고 그 순간, 팡, 하고 기중을 떠돌던 빗물이 다이무스의 위로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그는 어째서 네가 그곳에 있냐는 듯 검을 거두어들였고 천천히 샬럿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제가 만들어낸 구름 속에서 서럽게만 울고 있었다. 이 광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울어야하는 이유는 없었다. 사방에 낭자한 도축된 고깃덩이들을 발로 밀어 길을 냈다. 그는 한 때 포탑이 자리했던 흔적만이 남은 길을 걸어 돌아가고 있었다. 샬럿의 손은 제 옷깃을 쥔 채 하염없이 나겁하게 질려 있다. 그를 따라 걷지 못한 채 자꾸만 고장난 인형처럼 그를 불렀다. 
  "다이무스 아저씨."
  "돌아가지, 샬럿."
  다이무스는 다그치듯 그녀에게 속살댔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다이무스 아저씨, 다이무스 아저씨. 자꾸만 이어지는 호명에 마침내 다이무스가 보폭을 줄이며 뒤돌았다. 샬럿은 다이무스의 광대뼈와 입술과 그 눈을 훑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는 양 눈을 빠른 속도로 깜박이는 샬럿에 다이무스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샬럿. 그 순간 아이의 입술이 톡하고 터져올랐다. 왜, 왜 웃고 있어요? 짓뭉개진 발음 탓에 그 말을 알아 듣는 것이 쉽지 않았다. 왜, 다이무스 아저씨, 왜 그렇게 웃고 있어요? 그 자리에 다이무스는 멈춰선다. 그는 샬럿의 시선을 따라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자신의 입꼬리를 더듬었다. 신경이 죽은 듯, 그러나 전혀 어색하지 않게 비틀린 핏물을 핥아내는 혓바닥이, 손가락 끝에서 멈춰 있었다.

 

 

 

1) 만렙 다이무스가 방밸샬 구하러 가서 5전광 띄우고 쪼개고 돌아오는 글입니다. 여러분, 사이퍼즈 펜타킬 코멘트가 '제노사이드'라고 합니다. 미친 떡밥입니다. 알려주신 담장 님 감사합니다. 제가 쌈바를 추다가 운명할 것 같습니다. 전장의 화신과 미쳐 날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분입니다. 제노사이드래. 미친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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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피다무. 이십일 호.

http://averhaign.tistory.com/34

제피다무. 죽음. 블레이드. 이어지는 글.




  제피로스가 사라졌다. 어느 순간엔가 끊긴 추적 전파는 상황을 더욱 모호한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큰 문제는 아니었으나 결코 작은 문제 또한 될 수 없었다. 제피가 사라진 것과 제피의 내부 잔존할 시청각 자료가 사라진 것.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알 수 없는 전쟁 중 그들의 무기는 육탄에 그치지 않았다. 우선적으로 취급되는 것은, ‘정보’였다.

  제피가 사라진 것은 전투 중의 일이었다. 그나마 제피가 따르던 것은 회사의 물꼬맹이들(그녀들에 호의적이었던 것뿐이었다)이었고 그녀들은 기껏해야 후방 전선을 전담해 ‘어른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랬던 그녀들이 제피에 시선을 둘 수 있었을 리가 만무했고 애초 네비게이터란 지침하기 위한 것이지 부가적인 짐이 되기 위해 대동하는 것이 아니다. 고로, 사실 상 이후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되었다.

  물론 이딴 네비게이터의 여분이라 함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무척, 그들에겐 곤란한 일이겠지. 하얀 면장갑 아래 식어빠신 손이 약간은 거칠게 일어난 제피의 표면 위를 오갔다. 삐빅대는 소리가 끔벅끔벅 이어졌다. 어두운 지하에선 자가적으로 충전하는 것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하얀 가운을 걸친 사내는 몇 번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공만한 제피를 퉁퉁 무릎 위서 튕겨 보다 의자 너머로 시선을 돌려 묵묵히 미동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에게 제피를 던진다. 훅하고 묵직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이봐, 이십일 호."

  제피를 받아든 이십일 호의 허리가 그 무게에 일순 크게 흔들린다. 불구하고 여전히 표정없이 입술을 열지 않는다. 손아귀에서 펜을 굴리던 사내는 낄낄대며 천착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씨팔, 대답 좀 해봐. 쫄려 뒤지겠으니까. 그 말에 그제서야 이십일 호로부터 네,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정말 모체처럼 아가리가 무겁네. 재미없다. 하루이틀도 아닌데 저런 게 스물하나나 넘어 있다니, 흥미롭지만 악취미적이었다. 연구원이 된 지 10년이다. 여전히 재미있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네가 붙여 왔으면 그거 데려 나가서 햇빛 좀 쬐어줘라. 쨍알쨍알 존나 말도 많던 게 삘릴리하게 닥치고 있네. 전력 부족이야. 회사든 연합이든 구역 전력을 일반 가정집 수준으로 맞춰놨어. 어디 우리 땅속 벌레들 서러워서 살겠나. 저딴 축구공 먹여 살릴 전력은 없어."

  책상 앞의 의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벌레를 쫓아내듯 어서 꺼져버리라는 듯한 사내의 손짓에 이십일 호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오른발, 왼발을 내딛으며 천천히 티미한 불이 밝혀진 복도를 걸어 기지의 밖으로 걸어나간다. 모든 것을 엄폐하듯 개미집처럼 깊숙하게 지어진 기지는 축축한 공기가 그득했다. 검을 효율적으로 휘두르기엔 경미하나 썩 이롭지 못한 환경이다.

  그의 두 팔 안에서 끼긱대는 소음은 계속해 이어졌다. 이십일 호는 벙커를 열어 주변을 살펴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새벽 어스름이 뉘엿한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여전히 둥그런 제피를 안고 있었다. 해는 뵈지 않았고, 그는 햇빛을 쐬여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천천히 야트막한 언덕 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걸터 앉았다. 이십일 호는,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셈평이었다.

  "……제피 일어났어! 혼내지 마! 제피 안 졸았어!"

  그러나 몇 분이 흐르자 날개를 퍼덕대며 그 구체는 돌연 벌떡 튀어올랐다. 이십일 호는 손을 뻗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그것의 안테나를 낚아채 거머쥐었다. 제피 아파! 제피 아파! 그는 한참을 액정 위에서 번뜩대는 기묘한 문자들을 응시했다. 불명. 그의 얄상한 입술 새로 한 단어가 스며 나왔다. 불명. 제피는 좌우로 본체를 흔들며 가까스레 이십일 호의 손아귀를 빠져나온다. 적의적인 물체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것인지, 혹은 기기로부터의 적의는 알지 못하는 것인지 이십일 호는 다시 한 번 그것을 낚아채기 위해 든 손을 갈무리했다. 제피의 액정에 놀랍다는(듯한) 표정이 떠오른다. 이내 그것은 천천히 이십일 호의 곁을 맴돌았다.

  "어? 블레이드! 블레이드, 안녕!"

  이십일 호의 써늘한 시선이 제피의 액정에 닿았다. 블레이드, 안녕! 제피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인사를 하면 안녕! 하고 대답해야하는 거야. 블레이드, 안녕! ……안녕.




좀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기력이 없다…… 사이퍼즈 하고 싶다…… 제피다무 다른 분들이 연성해주신 거 보고 싶다(울먹)


1) 역시 제피가 클론 다이무스를 만났으면 한다. 그러다가 전투 이후 애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신체 정보가 다이무스를 일치하다 보니 아이가 과자 보고 쫄래쫄래 따라가듯 생존한 클론에 붙어 안타리우스로 따라갔으면(ㅋㅋㅋㅋ) 일단, 안타리우스 축에서는 되게 당혹스럽지 않을까. 이건 마치 물놀이 보냈더니 애가 남의 집 튜브나 자동차 키를 가져온 그런 기분(ㅋㅋㅋㅋ) 더군다나 제피가 어떤 원리인지도 모호할테고. 일단은 폐기보다는 투철한 실험 정신으로 제피를 분해할 것 같다. 제피의 코어를 이식하는 거(중요) 사실 이게 보고 싶었다(머슥) 개인적으로 제피는 역시 피터 또래의 소년 같은데 다 커도 괜찮을 것 같다. 덩치 커다란 청년이 클론 다이무스에게 붙어서 뺨 비비고 뽀뽀해달라고 난리치면 (나만)존씹귀모에사할 듯.


2) 제피가 정말로 다이무스가 다이무스가 아니라는 걸 몰랐으면 한다. 얘는 뽀뽀해달라는 말에 뽀뽀해주고 후퇴하자고 할 때 다이무스가 후퇴해주니까 그 상황이 너무 기쁘고 뿌듯하고 다행스러운 거야. 제피는 메커니즘 속에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고 있거든. 얜 그냥 다이무스가 안 죽었으면 하는 거. 그걸로 만족하는.


3) 그러던 어느날 눈앞에서 이글 같이 다이무스를 망설임없이 벨 수 있는 누군가에 의해 제피가 쫓아다니던 클론 다이무스 모가지가 댕겅했으면 좋겠다. 제피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 믿을 수 없어서. 그때부터 제피의 어딘가가 어그러졌으면 좋겠다. 한 명의 다이무스 클론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이 클론이 죽고 나서 새로운 대상을 탐색하려 시야를 넓히자 온 세상에 다이무스가 있는 거야. 근데 회사든 연합이든 다들 다이무스를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해. 온 세상에 제피의 적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온 세상. 하물며 죽어버린 능력자들의 시체들까지도. 일단 클로닝이라는 기술 자체가 미완성적인 거라 전투 중 폭사하거나 장기를 토해내는 다이무스도 있을텐데 제피는 그게 너무 분하고 서러웠으면 좋겠다. 안타리우스 측은 이게 반가움과 동시에 무척이나 곤란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그들에게는 제피의 핵심적인 인격을 건드릴 수 있는 기술이 없을테고(제피를 쪼대로 컨트롤할 수 없을테고) 불구하고 제피는 안타리우스(의 다이무스의 클론)에게 호의적일 거라는 거. 안타리우스 측의 누군가가 제피를 아주 살살 꼬드겼으면 좋겠다. 제피의 인식은 꼭 아기오리 같아서, 새로운 대상에 자꾸만 각인되는 건데 이게 다이무스에 한정되게 '오류'가 난 거였으면 한다.


4) 안타리우스 측에서 클론을 대량생산할 때 다이무스 본인을 잡아둘 수 없으니 유전자를 얻은 후 지속적으로 취하기 위해 다시 모체가 될 수 있는 클론을 하나 더 만들었을텐데(가장 오래된) 거기에 제피를 붙여두었으면 좋겠다. 적다보니 제피가 존나 케르베로스 같군(ㅋㅋㅋㅋ) 여하튼 이 클론은 다이무스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먼 옛날 다이무스가 안타리우스에 납치되거나 안타리우스와 전투를 했을 적까지의 기억만 가지고 있으면 한다. 여전히 기계적이고 감정은 없다. 근데 제피에겐 단편적이나마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다이무스가 생긴 거잖아. 비극임과 동시에 축복이다. 그러던 중 거대한 전투가 일어나 안타리우스의 아지트의 주축이 흔들릴 수 있을 정도의 소탕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클론들이 안전할 수 없을 정도의. 결론적으로 안타리우스 소풍 갔다가 발목 잡힌 제피 멘붕물… (^-^ )… 뒤는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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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새다무. 같이. (ㅋㅋㅋㅋ).

  가끔 이렇게 멍청하게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보내다보면, 아, 저 사람도 사람이구나 하고 막연하게나마 느끼게 될 때가 있다. 가령 과거, 한때의 우상이었던 가수가 치명적인 스캔들에 휘말린다거나 화장실 칸에서 걸어나오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깜박 잊고 물을 내리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는데, 지금의 경우는, 전등 갓 속의 죽은 벌레 두어 마리였다. 꽁새는 소파 위 무릎을 그러 안은 채 하염없이 천장의 무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적으로 시선을 내려 엎어진 액자, 알 수 없는 기준으로 분류된 책등을 훑다 제 맨발 아래의 가죽 소파, 그 밑의 슬리퍼, 그 아래의 카펫의 감촉을 막연히 상상했다. 분명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등으로 고개를 돌리는 일이 참도 어려웠다. 그는 어머니와 같이 않아서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거나 하는 일은 없을텐데. 단순히 기분을 위해 걸친 하늘하늘한 시폰이 손가락 새에서 물컹하게 주름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같은 말들이 빙글빙글 얼어붙은 채 돌고 있었다.

  저기요.

  있잖아요.

  아, 근데(마치 이제서야 떠올랐다는 듯).

  이름 없이도 그를 부를 수 있는 말들은 그녀의 모국어로 셀 수 없이 많았다. 문제는 저 잘난 인간이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었다. 꽁새는 한참을 생각했다. 실례합니다Excuse me?(그녀는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하고 내뱉는 자신을 상상했다) 이건 너무 거절의 여지가 많다. 헤이Hey? 이건 뒷말을 내뱉기도 전에 겁에 질린 타조처럼 꽁새 자신이 먼저 소파의 쿠션에 머리를 파묻고 다이무스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볼테고 그녀의 연애 라인은 망하고 그녀의 가정이 망하고 사회가 망하고 국가가 망하고 지구가 멸망할 게 불보듯 뻔하다.

  개방된 부엌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거셌다. 설거지를 하겠다 나선 것을 '접시가 걱정스럽다'는 말로 제지한 다이무스 홀든은 저게 익숙한 모양이지. 페티큐어를 바른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초를 세고 있자니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애초 어쩌다 자신이 이곳에 멍청히 들어앉아 가구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인지 기억해낼 수조차 없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가방 속에는 그녀를 꼭 닮은 지갑이 있었는데, 모든 원인은 그 속의 작은 종이쪼가리 두 장에 있었다. 하지만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이무스 홀든의 곁을 돌다 찾아온 것도 그녀였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홀든이 저를 집에 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의기소침해진 것을 제하면, 사실 상황은 그럭저럭 괜찮게 돌아가고는 있었다. 

  "다이무스."

  꽁새는 천천히 다이무스 홀든의 앞에서 내뱉을 말을 조용히 연습했다. 같이…… 영화 보러 갈래요? 한 장 남았는데. 거절은 거절합니다. 입에 올리자 더욱 낯간지러워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면구함에 두 손에 고개를 파묻자,

  "영화?"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를 향해 점점 다가온다. 아, 씨발, 미친, 들었어? 어디부터 들었대? 이름부터? 아니, 근데, 언제 설거지 끝났어요? 결코 가볍지 못한 공황 상태에 빠져 소파 위서 한참을 오뚜기가 되어 있던 꽁새는 황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에 빠진 양 팔을 허우적댔다. 그러자 곁으로 다가온 다이무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바로한다. 딱히 수줍거나 하는 감정보다도, 쪽이 팔린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애초 그녀는 그리 수줍은 사람이 아니…… 지는 않았다.

  다이무스 홀든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꽁새는 천천히 굳어진다. 썩 좋은 조짐은 아니다 뭐, 급한 있음 말고요. 거절 당하는 것에 어그러질 수 있는 분위기가 그리 달갑지 못해 '급한 일'이라는 변명을 애써 덧붙인 꽁새는 가방을 챙겨 든다. 그녀는 홀든은 지나쳐 철 지난, 납닥한 봄 구두에 허리 숙여 발을 꿰었다. 괜히 싱숭생숭하게 제가 제 속을 들쑤신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뱃속에 밀어넣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과일에 체할 것 같았다. 한참을 구두의 뒤축에 검지를 밀어 넣어 뒤척이다 마침내 고개를 들어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위로 먹먹한 검은 그림자가 진다.

  "……거절은 거절한다고 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문고리를 잡은 꽁새의 손 위 다이무스 홀든의 손이 닿았다. 꽁새는 잠시간 꼼지락대다, 이내 문을 밀어 열었다. 화창하다. 토박을 약올리기 좋은 날이었다.





http://lastpolka.tistory.com/27

여러분 이거 읽고 오세요. 어서 읽으시고 요한다무라는 돌아오실 수 없는 강을 건너십시오. 


1) 난 솔직히 꽁새 님이 진짜로 요한다무 뒤편 써주실 줄은 몰랐다. 매우 놀라웠다. 그리고 내가 꽁새다무를 생각보다 막힘없이 적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버렸다. 꽁새 님이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했는데 '1장 남았다'는 말에 다이무스가 영화관 가서 자기 분 결제하면 좋겠다. 꽁새 님이 막 놀라서 '헐, 아뇨, 그, 다이무스, 왜 돈 내요?'하고 당혹스러워하면 다이무스가 '한 장 남았다고 하지 않았나'라고 대답했으면. 둘 다 어버버했으면 좋겠군. 한쪽은 말이 방방 떠서, 다른 한 쪽은 말이 너무 없어서 의사소통이 이상해졌다! 결론적으로 다이무스는 제 사비를 들여서라도 꽁새 님과의 데이트를 수락할 생각이었다는 걸로~ (^0^)~ 메데타시~ 메데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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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다무. 조각글. 모호.

http://averhaign.tistory.com/23

바레다무. 아이. 이어지는 조각글.

 


 

 #

  "……리키?"
  다이무스는 문을 열고서 비척대며 들어선 히카르도 바레타를 안았다. 정확히는, 바레타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다이무스의 위로 쓰러졌다. 소년은 거대한 그의 몸뚱어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물음에도 답없이 이어지는 숨이 가빴고 가슴에 맞닿은 남자의 배는 붉은 녹을 토해냈다. 다이무스는 상황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단 한 번도 집을 상처와 함께 들어선 적이 없었다. 소년은 결코 나겁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한사코 자신의 핏자국을 숨겨왔다. 그런 그가 피를 토해내며 돌아왔다. 문득 겁이 밀려왔다.
  "정신 차려."
  내 목소리 들려? 옷의 단추를 풀고 손을 뻗어 상처의 윗부분을 동여맸다. 노골적인 근육조직들이 옷자락 아래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재생하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모지 안심할 수 없었다. 다이무스는 그를 들쳐 업고서 침대 위 굴려 밀었다. 한 번 잘게 움직일 적이면 아물기 시작했던 상처들이 희미하게 찢어져 핏물이 터져나왔다. 벗은 히카르도 바레타의 몸을 응시하며, 다이무스는 그제서야 그가 숨겨왔던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넙다리의 검은 실밥이 여즉 풀리지 못한 채였다. 누더기처럼 기워진 몸에는 자반 또한 그득했다. 맨 처음 밀려온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였다. 머릿속이 써늘하게 식어간다. 근간 자주 앓는 표정을 짓던 그였다. 어디 아파? 아니, 괜찮다, 다이무스.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대화를 떠올리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듯 입술이 씰룩였다. 거짓말쟁이. 다이무스는 중얼거리며 식은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냈다.
  드문드문 정신을 차리기는 했으나 히카르도 바레타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자주 앓았다. 어린 다이무스(그는 여전히 성을 받지 못했다)는 축축하게 젖은 물수건을 몇 번이고 쥐어 짜내며 그의 곁을 지켰다. 특별히 바레타가 눈을 뜨기를 바란 것도, 그렇다고 해 그가 숨멎기 바란 것도 아니었다. 굳이 갖다 붙이자면 이기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홀로 남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어린 소년에게 답지 않게 익숙했고 다이무스는 이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히카르도 바레타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잘게 기침한다.
  "바레타."
  소년의 입술은 톡톡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붉은 혀가 시계 초침 소리를 내며 억세게 구른다. 그는 천천히 구더기가 들끓는 남자의 귓구멍에 작게 속살댔다.
  "나는 남은 게 없어."
  진정 그러했다. 다이무스에겐 남은 것이 없었다. 애초 가진 것 또한 없었다. 그는 검푸른 체액이 흥건한 시트를 바레타의 아래서 빼냈다. 새로운 시트를 구겨 남자의 밑으로 끼워 넣는 손목에 핏줄이 섰다. 다이무스는 침대 곁의 의자에 걸터 앉아 히카르도 바레타 분의 세상을 눈에 담았다. 소년은 선잠만이 늘었다. 그는 매일 밤 비린내를 묻히고 돌아와 머리를 쓰다듬던 사내가 잠들었으니, 자신이 그 곁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열에 들뜬 얼굴로 바레타는 눈을 떠 다이무스를 찾았다. 소년은 대답했고 그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가 다시 잠들 때까지 퇴행적인 모든 어리광을 들었다. 나는 네가 조금 더 상냥했으면 좋겠어, 네가 조금 더 내 손을 세게 쥐어주면 좋겠어. 단 한 번도 사내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이무스는 그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고 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어주었다. 그러면 히카르도 바레타는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다이무스는 사내가 찾던 것이 제 음성이, 온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이무스."
  "여기 있어."
  다이무스…… 다이무스…… 홀든. 아.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못했다). 다이무스 홀든. 그렇게 속삭이며 바레타의 손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열쭝이처럼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다이무스는 굳어진 표정으로 그의 손길에 머리카락을 맡겼다. 홀든. 잠든 산의 한복판에 버려진 듯한 기분이 밀려왔다. 홀든…… 히카르도 바레타는 자꾸만 소년을 향해 말했다. 다이무스는 입술을 깨문다. 자꾸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마침내 대답했다. 그래, 리키. 그러자 바레타가 웃는다.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복해 꺼끌하니 마른 성대를 떨며.
  "……자네는 날 한 번도 리키라 불러준 적이 없었어……"
  까무룩 죽어가는 목소리가 말한다. 바레타의 손을 맞잡았던 제 깍지를 풀어냈다. 다이무스는 수건을 쥐어짜냈다. 사내의 내려온 눈꺼풀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흐르는 것은 없었다. 쪼로록하고, 대야 속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셔츠 위 점점이 방울이 되어 튀어 올랐다. 천천히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손바닥에 찬 물기를 털어낸다. 시계가 두어 번 더 돌게 되었던 때서야, 다이무스는 눈을 감을 수 있었다.


#

  바레타는 변색된 손가락을 꼿꼿하게 펴 도드라진 관절을 생각없이 한 번 훑었다. 자주 꾸물텅대던 혈관은 손목으로 이어져 푸르렀다. 한때 그는 손가락 새로 보이는 풍경들을 동경했다.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기도 했다. 그 좁은 틈사구니는 많은 것을 담았다. 얼어붙은 호수와 사람과 마음 따위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을 지워가며 그는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였고 그는 제가 죽는다면 다락 따위에서의 것이라고 상상했다.
  벽지에 그려진 아라베스크의 처음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여러 개를 겹친 여름 이불이 맨살 위에서 껄끔댔다. 소년이 그를 간병한 모양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얼마나 앓았는지 알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눈을 떴을 때 소년이 곁에 없다는 것은 작은 실망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내심 무언가를 기대해왔는지도 몰랐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다이무스?"
  바레타가 멍한 얼굴로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그곳에 있었다. 그는 탁자 위 엎드린, 점점 골격이 잡혀가는 탓에 각이 진 어깨를 보았고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늘 굳어져 있었으나 시선만으로 감정을 내뱉어왔는데 지금 만큼은 그같지 않았다. 중국산 자기처럼 허여멀겋게 표백돼 한꺼풀 막이 씌인 듯 낯선 얼굴이었다. 바레타는 침대 아래로 내려서며 한 번 허청였다. 자상들과 내상은 회복되었으나 며칠 간 걷지 못한 탓에 다리가 무거웠다. 그는 소년의 앞에 의자를 빼 앉았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어깨를 탁자 위 납싹 붙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바레타를 바라본다. 이제 괜찮아? 웅얼대는 목소리가 지쳐 있다. 눈그늘이 짙게 내려앉은 얼굴에서 끈적힌 졸음이 느껴졌다.
  "이제 괜찮다."
  조금 자라. 빳빳하게 머리카락이 선 소년의 뒷목을 눌러 재차 엎드리게 만들며 바레타는 대답한다. 다이무스의 고개가 천천히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가 고개를 묻으며 무엇인가를 빠르게 중얼거렸고 그와 동시에 히카르도 바레타의 손은 굳어져 탁자 위로 추락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색색대는 숨소리가 막혀 있던 소년의 목구멍에서부터 터져나왔다.
  ……MERCILESS?

  그 단 한마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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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피다무. 죽음. 블레이드.

#

  안구를 두드리는 빗물에도 더는 반응하지 않게 된 신체였다. 시간이 흐르면 부종처럼 부풀어 올라 뜯어먹히게 될 볼썽사나운 몸뚱어리. 제피는 다이무스 홀든의 머리맡으로 내려 앉았다. 그리고 홀든답게 최소로 줄여놓은 음량으로, 계속해 소리친다. 후퇴해, 후퇴! 후퇴할 타이밍이야! 온기가 남은 홀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피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여느때보다도 멍청하게 누워 척척하게 젖은 옷을 걸친 채…… 그저 그리 있었다. 제피는 그 몸의 온기가 사라져 가는 것을 렌즈 너머로 감지한다. 천천히 날갯짓을 해 그 얼굴 위 그림자를 드리워 빗물을 막아냈다. 이음새 새로 스미우는 빗물에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홀든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불쌍하게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어린 것은 더욱 거세게 소리쳤다. 후퇴해, 후퇴! 삐리릭대는 소리마저 죽여가며 제피는 그를 깨우기 위한 모든 행위를 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와 저와 다이무스의 홀든 위로 그려지는 어두운 그림자에 한 바퀴를 빙 돌며 주변을 시선 속에 담는다. 자그마한 두 손이 제피를 껴안았다. 그 품 속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구체에서 이내 불안한 음성이 어그러져 출력된다. 블레이드…… 샬럿은 말 없이 제피의 위로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후퇴할 타이밍이야……

 

#

  날 포맷할 거야? 낭랑한 목소리가 회사의 사무실을 울렸다. 내가 블레이드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건물로 들어선 크루그먼은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조노비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곤란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그 잔망스러운 무기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 죽일 거야? 제피의 그 말에 기어이 마를렌이 울음을 터뜨렸다. 빈 손의 계절이었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손가락 하나를 잃은 것에 가까웠고 회사의 그 누구도 어린 소녀들의 앞에선 홀든의 이름을 언급하지 못했다. 때문에 소녀들이 껴안고 있는 제피에 대해 묵인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네비게이터의 오작동은 치명적이다. 제피는 블레이드라는 키워드에만 대화하게 되었다. 제피와 다이무스 아저씨에 대해 얘기했니? 조노비치의 물음에 실핏줄이 터져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샬럿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피가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단 말이에요. 마를렌은 중얼거렸다. 다이무스 아저씨에 대해. 감정을 지닌 기기는 찌꺼기 같은 기억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드렉슬러의 잠자리채를 피하던 제피의 화면에는 언제부턴가 아무 표정도 단어도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희미하게 명멸하던 등으로 미루어보아 오작동은 아니었다. 그저 제피 자신이 거부하는 것이리라. 날 죽일 거야? 제피는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물었다.

 

#

  제피로스, 나와라.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비비며 홀든은 옷가지가 쌓인 바구니를 향해 내뱉었다. 도톰하게 부풀어 있던 바구니 속에서 제피는 안테나를 세우며 마침내 기어나왔다. 블레이드, 대단해! 제피를 찾았어! 그 목소리에 홀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만약 제피에게 팔이 있었다면 그는 지금쯤 짤박짤박 박수를 치고 있었을테지만, 안타깝게도 제피에게는 샤워를 끝마친 다이무스에게 맥주 한 캔 가져다 줄 수 있는 팔이 없었다. 안테나에 걸려 렌즈를 가린 옷가지를 털어내기 위해 빙글빙글 화급히 돌고 있는 제피에 다이무스 홀든은 손을 뻗었다. 이내 안테나에 걸린 속옷이 바구니 속으로 되돌아갔다. 제피는 거실로 향하는 다이무스의 어깨 위의 위치를 유지하며 재잘댔다. 블레이드, 제피 뽀뽀해도 돼?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질린 얼굴이 화면에 선연했다. 그 표정이 우스꽝스러워 제피는 제 화면에 블레이드의 얼굴을 띄웠다. 그거 무슨 느낌이야? 재밌어? 기계가 못하는 말이 없군. 다이무스의 손바닥이 제피를 소파 밖으로 밀어냈다. 차피 공중에 둥둥 떠 있어 떨어지는 일은 없었으나 제피는 집요했다. 블레이드, 키스는 어떤 느낌이야? 뽀뽀해도 돼? 그거 재밌어? 자꾸만 얼굴 주위를 사납게 맴돌며 깽깽대는 목소리로 외치는 것에 화가 난 듯, 홀든의 두 손이 제피의 양 날개를 붙잡았다. 그는 세척된 제피로스의 액정에 한 번 입술을 눌렀고, 금방 떼어낸 뒤 제피를 탁자 위 얹어두었다. 다시 날아오르리라 생각했던 제피는 날갯짓 없이 얌전했다. 그저 그 액정에 수많은 표정들이 오갔을 따름이다. ‘?!!!’나 ‘o0o’ 따위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홀든은 냉장고로 다가가 맥주를 한 캔 꺼내며 여즉 미동않는 제피를 향해 말했다. 기분 좋나? 웃음기마저 잘게 섞인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제피는 침울한 표정으로 두둥실 떠올랐고 홀든의 곁으로 다가가 내뱉었다.
  "잘 모르겠어, 블레이드."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홀든 또한 키스가 즐거운 일인지는 모른다. 그저 이 상황이 우스꽝스러운 것뿐이었다. 액정에 입술을 댄다 한들 제피는 그 의미도 감촉도 알지 못한다. 다이무스는 빈 캔을 납작하게 우그러뜨린 뒤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삐리릭삐리릭하고 제피의 소음이 귓가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한 번 더 해줘!"

 

#

  Are you gonna white me out? Just because I’m still remembering BLADE? Are you gonna kill me? Are you GOING TO KILL me? Just because I HAVE BLADE? Just because I won't try to let BLADE go?

 

 

 

마지막에서 두번째 '키스는 어떤 느낌이야?'는 티밋 님께서 주신 문장이에요! 그 문장 보자마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는데 그냥 건전하게 끝내기로…… (^-^)…… 제피다무 파주시면 안 될까요?

 

1) 다이무스가 죽고 나서 제피가 다이무스로 인해 오작동을 일으켰으면 좋겠다. 정확히는 조금 더 어그레시브(지금 한국어가 생각이 안 난다 ㅇㅣ런 십얼)하게 바뀌었으면 한다. 본래 제피가 '감정을 가진 기기'로 완성된 이후 사람들은 제피를 대량 생산해 무기로 만들려 했으나 제피를 만든 장인이 모습을 감추었다고. 제피가 진화할 수 있는 유의 기기라면 좋겠다. 제피가 찍찍 반말을 갈기는 이유가 어린아이의 인격이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내뱉는 언사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알고리즘을 사용한다는 게 제피의 매력 아닐까? 여느 기기가 그렇겠지만.

 

2) 제피가 스스로 무기를 되기 자처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블레이드를 아프게 한 사람들에게 가는 거야? 나도 갈래! 제피도 갈래! 나도! 나도! 그리고 안드로이드 수트에 제피 동기화나 시켰으면 좋겠군…… 기왕이면 실한 남정네로……

 

3) 다이무스의 클론을 마주친 전장의 네비게이터 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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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저다무. 저런.

  두 손과 다리를 결박당한 채 사내는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그것은 비단 입에 물린 재갈 때문은 아니었다. 벨저는 하얀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으로 다이무스 홀든의 귀 뒤에서부터 턱, 목덜미까지를 쓸어내린다. 그리고 목젖을 가로지르는 선연한 교흔에 검지로 잠시간 작은 원을 덧그리다 한 번 목울대를 짓누르고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오랜 시간 무력하게 늘어져 있던 신체가 평형 감각을 잊은 듯 뇌수가 쏟아졌다. 벨저 홀든이 손을 놓는 순간 금방이라도 넘어가 머리를 박살낼 수 있는 자세였다. 의자의 등받이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간다. 다이무스의 몸이 크게 한 번 허청인 뒤 균형을 되찾는다. 이제 벨저 홀든은 구둣발로 붕 뜬 의자 다리를 짓누른 채 다이무스 홀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붕 뜬 시선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러나 분노였다. 이지러진 비참을 향신료처럼 곁들인, 고운 빛깔의 감정.

  다이무스 홀든은 벨저의 낮은 웃음을 듣는다. 의자를 짓누른 다리에 힘을 주자 반동처럼 의자는 튕겨오르듯 앞으로 쓰러졌다. 벨저 홀든은 다이무스를 붙잡지 않았고,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처박힌 이마가 깨질 듯 아파왔다. 금세 뜨끈한 것이 흥건했다. 머릿속의 끈을 튿어낼 듯 비트는 감각에 큭, 하는 침음성을 삼킨다. 벨저 홀든의 손바닥이 다이무스 홀든의 뺨을 후려쳤다. 입 안에 들어찬 공 때문에 이빨이 나갈 것처럼 잇몸 뒤로 밀려난다. 삼키지 못한 타액 위로 붉은 것이 잉크처럼 섞여 흘러나왔다.

  "아, 이런, 실수. 좆처럼 잘 삼키고 있길래 그만 물려놓은 걸 잊어버렸어."

  벨저 홀든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오른 다이무스의 뺨을 어루어 만졌다. 다이무스의 부르튼 입술과 검게 죽은 입가에 그의 하얗고 긴 속눈썹이 닿았다.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 핏물 탓에 오른쪽 눈을 뜰 수 없었다. 피라니. 벨저는 티 테이블 위를 손으로 더듬어 식어빠진 홍차가 든 잔을 집어든다. 그리고 천천히 잔을 기울여, 다이무스의 머리 위에 들이 부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찻물에 가라앉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저런."

  단물을 빨아내듯 그 머리카락을 잘근대며 씹으며.

  "화내지 마. 꽃에 물을 준 것뿐이니까."

  벨저가 중얼거렸다. 상냥한 표정이 점차 기색을 감추고 가학적인 미소만이 그의 입가에 남았다. 평생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악의적인 얼굴이었으나, 하반신에는 열이 올라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마침내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어디까지 가나 가늠할 셈평이었을 터다. 저와 같은 성을 공유하는 저 재미없는 남자는 언제나 재보길 즐겼다. 어릴 적부터 누누이 그만 두라 얘기했는데…… 아무래도 학습하기엔 너무 안이하게 대했는지도 모르지. 벨저는 결국 다이무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착하지, 다이무스? 쉿, 앙살 피지만 않으면 더는 때리지 않을게. 예쁘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지? 그리 속살대는 목소리는 참도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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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렉다무. 발작.

  새벽 내내 비가 왔다. 점심이 되어가자 빗줄기는 고장난 샤워기의 물줄기처럼 가늘어지다 이내 그쳐버린다. 계속해 비가 내린다면 나가시 않을 셈평이었기에 드렉슬러는 입을 다셨다. 1.5파운드짜리 비닐 우산―던적스럽게 그를 엿먹이곤 했던 비를 떠올리며―을 꺼내 쥐고 그는 카펫의 솔을 꾹꾹 갈라진 나무 타일의 틈사구니로 밀어 넣으며 구름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먹먹했다. 그의 몸 또한 이 좁은 방구석의 일부분이 되어 습기를 머금고 깊은 곳에서부터 삐걱이고 있었다. 누군가 제 등의 나사를 거꾸로 돌려낸 것 같았다. 그의 생각도, 휠체어의 바퀴도 요철을 떠나 같은 곳을 헛돌았다. 그의 인생의 10분의 1도 알지 못하는 학장이 경고한 것처럼, 그는 망가져 가고 있는 권태기의 벨트 위에서 멍청하게 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망가진 장난감 병정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언젠가 이 모든 우주에서 도태되어 검은 톱니바퀴에 뼈가 으스러져 뒈질 것이다.
  머뭇거린 것이 무색하그로 현관은 허히 비어 있었다. 그곳에서 다이무스 홀든을 본다. 미간을 엷게 찌푸리며 사포로 긁힌 신발 밑창을 들춰보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잔을 깨뜨린 어린 아이처럼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걷지 못하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신발이 닳을 일도, 신발이 닳을 일을 할 수도 이젠 없었다.
  누군가 알아차려주기를 바라 자꾸만 신발끈을 풀었던 어릴 적을 기억한다.
  현실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매끈한 밑창을 사포로 긁어대던 저를 또한 떠올릴 수 있었다.
  홀든을 바라본다. 손을 뻗지도, 제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은 홀든을. 시선을 피하며 신발장을 열어 새 것처럼 반질반질한 구두를 꺼냈다. 가장 오래 되었지만, 가장 새 것같은 구두였다. 신발장의 구두들은 언제나 새 것처럼 반질반질하다. 학장은 드렉슬러에게 망가짐을 단언하고선 이후 변명하듯 그에게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 얘기했다. 분한 일이었으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는 언제나 괜찮아야만 했다.
  "걸을 수 없지만 걷고 싶어하지 않는 건 아니다, 멍청아."
  눈 깔아. 변명하듯 내뱉었다. 홀든은 고개를 끄덕인다. 드렉슬러는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신발 뒤축을 늘여 발을 꿰어 넣었다. 너는 없으면서 잘도 있는 척을 해. 원망 섞인 목소리에 홀든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이내 흩어져 머릿속으로 먼지처럼 사라졌다.
  휠체어의 손잡이에 걸어둔 우산은 길바닥 이곳저곳을 두들겼다. 빗줄기만이 그쳤다 뿐, 바닥은 여즉 끔찍스럽게 젖어 있었다. 가을의 테를 벗어 던지려 드는 나무들이 회랑의 기둥처럼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누렇게 물든 낙엽들은 거절당한 손수건처럼 나뒹굴었고 스산하게 몸을 치댔다. 흔해빠진 불쌍한 인간들 중 한 명이 되어 다리오 드렉슬러는 코트를 여민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밖으로 걸음을 옮겼는지 알 수 없었다. 휠체어의 뒷주머니로 손을 뻗자 두루말이 휴지와 플라네타륨, 그리고 레이저 포인터가 손에 잡혔다. 우습지도 않다.
  그는 먼 거리를 움직여 카페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먼 거리로 향하던 도중 카페로 움직였다. 언젠가 홀든이 제 손에 쥐여주던 종이 커피잔의 상표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제가 충동적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학교 앞 여느 곳에나 있을 법한 싸구려 카페에는 방향제 같은 커피향이 둥둥 떠다녔다. 종업원들은 그를 신경쓰지 않았고, 드렉슬러는 아무 테이블의 의자를 옆으로 밀어내고 휠체어를 갖다대 앉았다. 그는 메뉴판에서 가장 이름이 긴 무언가를 두 개 시켰다. 그는 그 낯간지러운 외계어들을 말하며 손톱 밑에 끼인 때를 바늘로 긁어 빼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몇 번이나 버벅대며 그 단어들을 잘못 말했다. 주문을 받던 종업원이 결국 그의 말을 자르고 메뉴를 되물었고 다리오 드렉슬러는 백치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다.
  무스 케이크 위의 젤라틴을 포크로 걷어냈다. 네가 조금 더 강해져야 할텐데. 마법 같은 문장을 떠올렸다. 너. 네가 조금 더. 강해져야 할텐데. 주체 없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흩날리는 전단지 같았다. 드렉슬러는 시뻘건 젤라틴이 덕지덕지 발린 포크를 옆으로 밀쳐낸 의자에 앉은 홀든의 앞에 흔들어보았다. 먹어볼래? 홀든이 고개를 저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포크를 접시에 긁어 젤라틴을 닦아냈다. 그 구석진 자리서 한 눈에 봐도 퍽퍽해 뵈는 시트에 네 개의, 여덟 개의 구멍을 만들며 그는 턱을 괸다.
  "휴직했다."
  다이무스 홀든이 그 말을 듣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외출을 하는데 네가 보일지는 몰랐고……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커피잔 위에는 허연 우유 거품이 그득했다. 드렉슬러는 눈을 살짝 들어 홀든의 옆모습을 훔쳐 보았고 스폰지처럼 구멍을 뚫은 케이크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에서 반지를 낀 홀든의 하얀 손가락이 무엇인가를 연주하듯 간헐적인 소음을 만들어냈다. 반사적으로 그의 옆으로 휠체어를 조금 더 붙이기 위해 휠체어의 휠을 쥐었다. 그러자 눈 앞으로 무엇인가가 들이밀어졌다. 손수건이었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드렉슬러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홀든의 손을 거절했다.
  "너는 차피 여기 없잖나."
  입밖으로 내뱉자 조금 더 확실해진다. 드렉슬러는 제 손에 들린 손수건을 휠체어의 뒷주머니로 던져 넣었고 은빛 반지를 낀 손가락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지했고 케이크가 더럽게 맛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이무스 홀든, 씨발 새끼. 잘게 웃던 그는 식어빠진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환상같은 메탄올이다(그는 자주 상상했다). 하기사 그는 다리를 잃지 않았더라면 눈이라도 멀기 위해 발작했을런지도 몰랐다. 육신은 관이되 세계는 또다른 관이었다. 그는 몽조의 한 켠에 저를 수용시킴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잔이 카페의 타일 바닥 위로 떨어져 깨졌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표정의 변화 없이 그것을 내려다본다. 허공에 여전히 잔을 쥐고 있는 양 살짝 안으로 말려들어간 검지와 중지를 그리고 다시 바라본다. 그는 천천히 제 주머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유리로 된 앙증스러운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자그마한 알약들을 입 속에 털어넣었다. 물없이 턱을 비틀어 씹어내자 녹은 플라스틱 같은 맛이 지독했다.
  빨대를 가져다 주겠어, 홀든? 그는 카페의 입구에서 자신을 감흥없이 응시하는 다이무스에게 말했다. 손님, 괜찮으세요? 종업원의 물음에 허허로이 웃으며. 다리오 드렉슬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자주 이러거든. 들뜬 머리로 생각하기에도 이것은 이상했다. 홀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밀랍인형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감정을 거세당한 것 같았다. 드렉슬러는 레이저 포인터로 기하학적인 문양이 빼곡한 카페의 천장을 가리켰다. 집중해, 다이무스 홀든, 나에게 집중하라고. 종업원의, 점자척으로 겁에 질려가는 목소리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다이무스 홀든의 이마에서 콧등으로, 콧등에서 입술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일어 서 걸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충동적으로 팔에 힘을 줘 휠체어에서 가까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다리를 들어 땅 위로 옮기자 거세게 세상이 흔들렸다. 홀든의 손이 다리오 드렉슬러의 무릎에 닿았다. 드렉슬러, 그만. 그리 내뱉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드렉슬러는 폐를 들어낼 듯 자지러지게 웃는다. 들었습니까? 이 매정한 연인이 지껄이는 말을 누가 좀 들어봐! 불구하고 그 말이 그의 입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깨진 도기 파편이 그의 뺨을 찢었고, 앙상한 가지 같은 두 다리를 덮은 바짓단만이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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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저다무. 네가.

  "다이무스."
  수틀리는 일이 생기면 벨저 홀든은 신발 뒤축을 질질 끌곤 했다. 우아하지 못한 버릇에 진절머리를 내는 어머니의 성화에 타성으로 굳어진 짜증은 그토록 노골적이었고 한편으로는 (전연 그답지 못하게)소심했으며, 전염성 짙었다. 그리고 그러한 유의 감정들이란 언제나 예고없이 발발하는 것이어서, 귓구멍을 벅벅 긁어대는 구둣굽의 소리에 다이무스 홀든은 소녀로부터 고개를 돌려 제 아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는 가볍게 다이무스의 목에 감긴 타이를 두어 번 엄지와 검지로 비벼보다 마치 네가 그곳에 있었냐는 듯 아차, 고개를 들어 다이무스의 앞에 수줍게 선 소녀를 향해 미소 지었다.
  "무슨 일이야?"
  하지만 그 질문은 소녀가 아닌 다이무스를 향한 것이었다. 소녀는 반사적으로 입술을 뻐끔댔으나 경멸에 찬 벨저의 시선에 입술을 다물었다. 다이무스는 당연스러운 벨저 홀든의 목소리에 순간 제가 그 말을 내뱉지 않았나 하는 착각에 빠질 뻔 했다. 고개를 옆으로 빼꼼 내밀어 다이무스의 어깨에 가려진 소녀를 노골적으로 응시한다. 그 손에 들린 낯간지러운 편지 봉투며, 곱게 손질된 손톱 따위는 벨저 홀든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 신경을 쓸 가치가 없었다. 검을 쥐는 손답지 않게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이 손가락질 한다.
  "그거 다이무스에게 주려했던 게 아닌가?"
  모두가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 벨저는 말했다. 무디게 마모된 편지 봉투의 모서리를 더듬던 소녀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조금 귀찮은 일이었다. 줄 거면 어서 건네고 꺼지라는 이 고상하게 우회를 알아듣지 못한 체 하는 것인지 혹은 진정 머리가 빈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저렇게 추하게 생겨 숨쉬는 게 쉽지 않을텐데."
  조곤하게 진정 걱정하듯 내뱉은 벨저 홀든의 손이 억세게 다이무스 홀든의 손목을 거머쥔다. 여전히 웃고 있다. 그는 엄지와 중지로 고리를 만들어 탈골시킬 양 다이무스의 뼈를 뒤틀었다. 겉에서 보기엔 이 얼마나 다정한 형제일까. 입 안이 쓰다. 벨저에게 거세게 잡아 당겨졌기에 다이무스는 반사적으로 반대편 겨드랑이 새에 끼워둔 책을 손으로 꼭 쥐었다. 다이무스가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인지 기숙사로 걸음을 옮기며 자꾸만 그 팔을 잡아끌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제 발소리와 벨저의 발소리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버릇도 전염성인 것인가. 뭉툭하게 쓸린 벨저의 구둣굽을 상상한다.
  "벨저."
  이번엔 무어가 그리 수틀린 거냐. 기숙사의 방문 앞에서야 다이무스 홀든은 팔을 휘저어 벨저의 팔을 떨쳐냈다. 두어 번 손목을 매만져 굴리며 어느 순간엔가 무표정하게 돌아온 벨저를 바라본다. 벨저는 문을 돌려 열며 다이무스를 침대로 밀쳐냈다. 이번엔? 뻣뻣하게 굳어진 몸에 침대로 밀려나기보다는, 털썩 주저앉은 꼴이 되고 말았다. 벨저는 손을 들어 어깨를 침대 위 잡아 눌렸다. 이내 무릎 새에 허리를 죄어 가둔다. 아킬레스건을 애무하듯 쓰다듬다 내려온 손이 다이무스의 구두를 카펫 위로 던졌다. 철걱대며 바지를 끌어내린 벨저는 다이무스의 허벅지 새에 제 성기를 비볐다. 다이무스는 묵묵히 축축한 혀가 귀 뒤를 핥아 올리는 것을 견뎌내고 있었다.
  "네가 날 이렇게 만들어."
  손으로 성기를 위아래로 문지르다 허연 교복 셔츠 위 사출했다. 서너 번에 걸쳐 정액이 뿌려졌다. 벨저는 촘촘하게 직조된 천 위 고인 정액을 손으로 찍어낸다. 그 손이 옴폭 패인 제 형의 머리채를 거머쥐고 뺨을 더듬는다. 다이무스의 머리카락에도 흥건히 허연 액체가 엉겨 붙었다.
  "……그런가."
  광대를 덧그리듯 오가여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그 손가락을, 다이무스는 대답과 함께 고개를 돌려 혀끝으로 핥아올렸다.

 

 

 

1) 개인적으로 홀든즈 사립 기숙 학교에 대한 로망이 끊이지를 않네요. 제복에 가까운 교복에 다림질이 빳빳하고 의외로 낙후된 구기숙사가 원내에 있었으면 좋겠어요(멍뎅) 사실 그것보다도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형제가 보고 싶어 그런 걸지도 모르겠고요. 일단 사내 놈 둘이 있다는 것에 뒤처리가 무척 미숙할 거라는 게 제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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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샹다무. 인어.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공개되어 좋은 것은 없으니까요."
  박사는 수심 깊은 수조를 향해 허리를 숙여 손을 담궜다. 투명한 물이 일렁이고 반사된 빛이 천장에서 유리처럼 흔들린다. 차다. 그리고 짰다. 자네의 초대를 받다니, 이것 참 영광이로군. 그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데샹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데샹의 웃음에 박사가 손을 털어내며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그러나 박사는 크게 휘청였다. 그는 수면 위로 시선을 돌렸고 하얗게 뻗어나와 제 바짓단을 거머쥔 손을 보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이에 데샹은 가운의 소매를 걷어 수조로 다가간다. 그는 흰 손을 약하게 쥐어 다시 수조 속으로 빠뜨렸다. 퐁당, 하고 저항없이 힘 없는 팔이 떨어졌다. 잘게 튀기는 물방울에 박사는 한 걸음을 뒤로 물린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유순한 아이거든요."
  데샹은 수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부른다. 홀든. 물결을 머금듯 입술을 띄우고 내뱉자 작게 파문이 일고 한 청년이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다. 박사가 숨을 머금는 것이 등 뒤로 느껴졌다. 청년의 목덜미를 감싼 아가미 아래로 핏줄이 선연한 붉은 속살이 보였다. 맑진 물 밑에서 물빛 꼬리가 유려하게 흔들리고 데샹을 향해 뻗은 손에는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만 같은 물갈퀴가 손가락 사이마다 자리했다. 박사는 청년이 저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회색 눈에는 동공이 없다. 청년의 입술이 빠르게 무엇인가를 중얼거린다. 풀피리 같은 소리로.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사는 청년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한 번 대화해보시죠. 데샹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름이 무언가."
  뻐끔. 아가미가 움직인다. 대답 대신 피막같은 물갈퀴가 달린 손가락이 사내의 뺨을 두드렸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더없이 고혹적이다. 청년의 젖은 팔이 박사의 목덜미로 다가갔고 그의 양복은 검게 젖어들어간다. 박사는 멍청하게 청년의 뺨에 들러붙은 하얀 머리카락 가닥을 세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고 세상에 마치 이 기이한 생물체와 저만이 남겨진 듯 싶었다. 청년의 얼굴이 점점 박사의 코앞으로 다가왔다. 정확히는, 박사의 고개가 천천히 수면을 향해 떨어져만 갔다. 그리고 마침내 둘의 입술이 맞닿았고―데샹의 구둣발이 낡은 노인의 등을 걷어찬다.
  풍덩하고 거대한 물장구가 일었다.
  근육이 잡힌 팔이 박사의 몸을 으스러뜨릴 듯 껴안은 채 입술을 삼켜 놓아주지 않았다. 물 속에서 홀든의 어깨를 거머쥐고서 그를 떼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박사의 몸부림을 내려다보며 데샹은 잔을 들었다.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그들의 접문한 부위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와 청명했던 수조의 한 가운데에 피구름을 일으켰다. 물을 뒤집어 쓴 것은 불쾌했으나 이보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그랑 기뇰에서도 보기 힘들다.
  박사는 다이무스의 품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것이 거슬린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이 혀를 끊어내고 목덜미를 물어 뜯는다. 허옇게 드러난 뼈를 다시 입으로 집어 몸뚱어리 바깥으로 빼내자 악착같이 굳어졌던 사지가 늘어졌다. 가장 수심한 곳으로 시신을 끌고 들어간 볼썽사나운 인어는 포식했다. 즉사시키지 못한 고깃덩이는 언제나처럼 수축한 근육에 질겼다. 물 속에서 이어졌던 비명과 고로록대던 소음에 귀가 아리다. 먹이는 뒈져버렸음에도 반향처럼 자꾸만 머릿속을 울려온다.
  드넓었던 수조가 분홍빛이다. 데샹은 빈 잔을 내려놓았고 다이무스 홀든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희미한 수면 아래 그림자가 데샹을 향해 다가왔고 이내 고개를 내밀었다. 그 머리카락은…… 참 결벽하게도 하얬다. 그것이 못내 우스워 데샹은 키들대며 다이무스 홀든의 손을 쥐어 수면 밖에서 조물딱거렸다.
  "맛있었나, 홀든?"
  손톱 아래 끼인 살점이 고작 몇 분 새 검붉게 말라 붙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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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다무. 아이.

  특별히 운명적인 만남도 희극적인 죽음도 아니었다. 그는 이전과 같이 소화됐으며 이전과 같이 연소했다. 남은 것은 몇 방울의 물과 이산화탄소 뿐으로, 도모지 그의 생에 도움이 되지 못할 한 줌의 폐기물뿐이었다. 그런 삶에 대해 '제법 가치 있다'는 평을 내뱉던 사내는 어쩌면 히카르도 바레타라는 괴물의 일생을 동경했는지도 몰랐고 자신의 이름자를 새길 묘비 대신 바레타의 뇌를 예정했는지도 몰랐다. 그리 죽지 못해 사는 청년에게 가치를 단언하던 그 사내는, 바레타의 눈 앞에서 두 다리를 잃고 자수했다. 그는 무척이나 짧은 망설임 끝에 제 심장에 검을 박아 넣었고 바레타는 그를 살려낼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무척이나 짧게 고민했으나 이내 손을 거두었다. 전장에서의 일이었다.

  기실 사내의 죽음은 일찍이 예견된 것이었다. 그 생을 연명한 것은 바레타였으며 자살한 것은 사내였다. 바레타가 기억하는 한 사내의 첫 번째 죽음은 가해적인 것이었다. 독이었다. 홀든? 몇 번이고 그 이름을 부르던 바레타는 그를 들쳐 업었고, 그는 데샹의 병원 한 구석에서 금세 천천히 숨을 잃어갔다. 아찔하게 녹아내린 촛불을 손꼽아 기대하는 표정으로 데샹은 조소했다.

  살릴래?

  때문이었을까, 그 목소리가 유독 침음하게 들려왔다. 바레타는 고개를 숙여 홀든을 응시했다. 그의 사지는 뻣뻣하게 굳어갔고 핏기를 잃은 얼굴에선 금방이라도 석고가 부스러져내릴 것만 같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살갗을 찢고 들어온 굵은 바늘이 검붉게 찐득한 피를 빨아들인다. 그리고 이내 바늘을 갈아끼운 피스톤을 천천히 데샹은 밀어냈다. 그럴 리가 없었음에도 꿀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제 피를 삼킨 사내의 혈관 속에도 벌레들의 시체가 떠돌아다녔을까에 대해 바레타는 사내에게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사내 또한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을 터다. 그는 어쩌면 상처를 타고 올라오는 구더기들을 보았을 수도 있었다. 슬프게도, 그 시절의 바레타에게 선택할 수 있는 유의 죽음이란 되려 축복이었다. 허무했으나 생각보다 슬프지는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잃은 사내의 손에는 ‘히카르도 바레타’라는 자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나 날밤을 새워 자괴한 것이 전부였다. 불구하고 사내의 죽음은 옅어지는 일 없이 여전히 바레타의 혈관 속을 포화해 노닐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진정 죽어버린 것이다. 홀든 가는 그를 밀장했다. 없던 사람과 같았다.

  피에 젖은 셔츠를 쥐어짜내 물기를 털어냈다. 손금을 따라 스민 검붉은 빛깔은 여즉 선연했으나 천은 더는 살갗에 들러붙지 않았다. 바레타는 어느 순간엔가 실재적인 수치보다는 ‘이번 죽음의 서너 번 전의 죽음’이라는 말로 상황을 퉁치는 일이 잦아졌고 그것에 대해 누구도 반문하지 않는 때가 찾아오게 되었다. 그는 노쇠하지 못했고 시간을 얻음과 동시에 한없이 잃었다. 결국 히카르도 바레타는 제가 원하는 것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죽은 것들을 본다던 소년의 힘을 빌어, 마침내 찾아낸 파편을 훔쳐 달아났다. 바레타는 어린 아이를 만났다. 정확히는, 갓난아기였다. 부패된 뒷골목에서 생선 내장 사이에 고개를 처박힌 채 파들대며 간간한 숨을 내뱉던 핏덩이. 호오. 검은 머리를 땋아내린 청년이 휘파람을 불었다. 찾았네, 축하해. 그것이 축하받을 일이었을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바레타는 자신이 후회할 것을 알았고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갓 태어난 낡은 생명의 길에 예측되지 못한 것을 또한 알고 있었다. 욕심이다. 하지만.

  "……냄새."

  골목으로 들어선 소년이 코를 옷소매로 가리며 천천히 중얼거린다. 자그마한 구둣발과 차차 근육이 잡혀가는 허벅다리를 올라 바레타의 시선이 마침내 그 얼굴에 닿는다. 이름이 조곤히 불리고 소년은 고개를 든다. 억센 눈썹과 도톰한 입술, 시멘트 벽 같은 빛깔의 안구가 도록도록 굴렀다. 바레타는 그가 꼭 예전 같다고 느꼈다. 그 뺨에는 어떠한 흉터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구두 밑창에 철벅이는 흙바닥이 거슬리는 것인지 자꾸만 미간을 찌푸린다. 바레타는 피묻은 장갑을 벗어 바닥에 던져 유기한다.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애송이가 올 곳이 아니다."

  바레타는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마치 등을 보호하듯 그리고 그 뒤에 섰다. 소년이 손을 뻗어 바레타의 손을 망설임없이 쥔다. 벌레들의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변색된 그 손가락 마디마디를 천천히 잡아당긴다. 말없이 손을 빼내려 하자 아주 약간이었으나 손아귀에 힘을 가하는 것이 느껴졌다. 바레타는 포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더럽다, 다이무스. 소년은 대답않은 채 일그러져 형체를 잃은 이름모를 사내의 시신을 일별했고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그 작은 몸뚱어리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여전히 적응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곁에 있는데 이곳의 것 같지가 못했다.

  "다이무스."

  바레타는 소년의 겨드랑이 아래 손을 집어 넣어 들어올려 끌어 안았다. 꾸불럭대는 산 자의 팔을 짓밟자 말캉하면서도 굳어진 감각이 유난하다. 소년의 가느다란 팔이 바레타의 목에 둘러졌고 솜털이 보송한 뺨이 그 목에 기대온다. 새로운 형태의 삶이었다. 제3세계로의 도피라고, 겁쟁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한다 한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잃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유대랄 것도 없었다. 그저 몇 마디 말과 호흡에 매료당해 수음했고 밤을 나누었다. 어쩌면 홀든에게 바레타는 감정적인 의미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가진 것을 점차적으로 잃어가고 있는 사내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이 몸뚱어리였을 수도.

  죽어가는 다이무스 홀든에게 바레타는 주기적으로 수혈했다. 그러면 남자는 기적처럼 숨을 쉬었고 걸을 수 있게 되었고 더욱 나아가 검을 쥐었다. 홀든은 그것이 제 목숨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바레타 또한 마찬가지였다. 데샹이 호기심에 일을 진행한 것은 모두에게 정명한 일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잘잘못을 따질 수없을 수렁으로 이야기는 진행되었다. 전쟁은 소강기에 들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바레타는 허청였다. 홀든은 고맙다는 말은 아끼지 않았으나 결코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마치 그리 느끼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끝날 걸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고 그렇던 하루, 다이무스 홀든은 쓰러졌다. 그는 당연하게도 데샹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글 홀든의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바레타는 그의 몸을 건네받았다. 문이 닫히는 순간, 까미유 데샹은 그것이 진귀한 발견이라는 듯 입을 가렸고 턱을 괸 채 바레타의 피를 뽑아냈다. 튜브를 채워가는 검은 물을 보며 바레타는 아무래도 데샹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그의 저의를 물었던 것 같다. 그는 그것을 '흥미로운'이라는 단어로 압축했다. 다이무스 홀든은 이미 죽었어. 탁, 하고 그의 눈을 가리던 유리알이 손바닥으로 내려왔다. 바레타는 위아래로 희미하게 들썩이는 홀든의 가슴을 응시했다.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데샹이 팔짱을 낀다. 불투명한 혈액팩이 거치대 위에서 대롱대롱 경고등처럼 빛을 받아 흔들렸다. 숨, 쉬고 있는데. 바레타는 변명처럼 내뱉는다. 어제 수혈한 건 네 피가 아니었어. 목소리는 어린아이를 어르듯 조곤했다. 고개를 들어 데샹을 바라본다. 그건 내 피였고─다이무스 홀든의 심장이 멎었지. 데샹의 손가락이 툭툭 피스톤을 두드렸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나는 모든 산 심장을 통제할 수 있어. 너는 죽은 심장을 쥐어짜내 펌프질하지. 다이무스 홀든은 이미 죽었어. 그에게는 내 힘이 듣지 않거든. 그는 하루하루를 생존하는 것이 아니야. 이 끔찍스러운 시체는 추깃물 없이 죽은 몸을 일으켜 움직이는 것뿐이라고.

  '이건.'

  마침내 데샹은 다이무스 홀든의 손등에 다른 바늘을 찔러넣으며 말을 끝맺었다.

  '너와 같은 '괴물'이야.'

  주사기 속의 액체가 모두 사라지자 데샹은 너스콜과 함께 미련없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등 뒤로 철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도모지 기억을 해낼 수가 없었다. 데샹의 말의 반향은 파破가 난 잔처럼 바레타의 귓속에서 절그럭대는 소음을 냈다. 문득 그런 귓불에 닿아오는 차가운 손에 바레타는 흠칫 몸을 굳힌다. 그는 시선을 돌려 현실을 본다. 밑털이 보송한 소년의 관자놀이, 하얀 정수리.

  "무슨 생각 해?"

  목소리는 잔등같았다. 바레타는 고개를 저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을 대신했다. 점심은 먹었나? 이번에는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그제서야 바레타는 소년의 손이 닿을 법한 찬장이 모조리 텅텅 비어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소년은 음식을 가리지 않는 편이니 도리질이나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보다는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는 말이 더 나은 대답이었으리라. 그러나 소년은 긴 말을 하는 법이 없었고 홀로 지내던 적의 버릇이 굳은 살처럼 그들의 생활이 이따금 이와 같이 끼어들곤 했던 탓에 바레타는 자주 곤혹을 느꼈다. 소년의 손이 닿는 곳에 필요한 것을 두는 것도 길을 들여야하는 지경이었다. 그들에겐 말하지 않으면 서로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마지막 순간의 '홀든'이 그러했듯이.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자 큼큼한 가래가 목에 들어차는지 소년이 목을 가다듬는다. 바레타는 가장 위의 장을 열어 보관된 빵과 계란을 꺼냈다. 한참 위의 바레타를 향해 고개를 치 든 소년의 목에는 울대조차 없이 매끈했다. 소년은 의자를 들어 스토브 앞에 가져다 놓았다. 신발을 벗고 양말을 신을 채 그 위로 기어 올라간다. 팬에 엷은 기름을 둘러 바레타가 건넨 계란을 풀었다. 금세 제대로 된 요리같은 냄새가 난다.

  "아."

  소년이 작은 신음을 내뱉자 바레타는 툽툽한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 자위적으로 키들댄다. 웃지 마. 심퉁이 난 것인지 금세 토라진 다이무스가 계란을 뒤적였다. 터져버린 노른자가 짜증스러운 모양이었다. 일그러진 미간에 비해 손은 얌전히 바레타가 건네는 소금을 받아든다. 퍽퍽하게 잘린 고깃덩이들과 계란이 접시 위에 덩그러니 올려지고 빵 몇 덩이가 담긴 바구니가 곁을 장식했다. 다이무스는 그것을 옮기는 바레타를 바라보다 의자 밑으로 다시 기어내려와 구두를 꿰어 신었다. 그리고, 잠시간 코팅되지 않은 나뭇바닥에 찍힌 검붉은 제 발자국들을 응시하다 바레타의 시선이 채 닿기도 전 의자를 들어 옮겼고 그 위에 소파의 쿠션을 얹었다.

  그는 의자 위로 올라갔고 쿠션 위로 올라가 손을 놀린다. 포크가 범벅이 된 계란을 찢고 고기를 찍는다. 바레타는 입속에서 물컹하게 터지는 것을 씹으며 맛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기실 미각을 잃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으나 더는 어떠한 연기를 해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아 황망한 표정으로 턱을 움직였다. 다이무스는 달그락대는 싸구려 식기들의 소리를 듣는다.

  그는 단 한 번도 바레타의 존재에 대해 의식한 기억이 없었다. 그저 머리가 굵어지고 기억이란 것이 누적되기 시작했을 때 즈음에도 히카르도 바레타라는 사내는 그의 곁에 있었다. 부모 행세를 하며 유독스레 다이무스를 위험으로부터 배제시키려는 노력도, 그를 챙기는 일도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 전연 무관심하지도 않았다. 다이무스는 모든 것에 그러려니 말을 아꼈다. 히카르도 바레타가 저를 책임질 수 없다한들─심지어 바레타는 다이무스에게 이름만을 주었을 따름이다─표면적이나마 보호자와 피보호자였다.

  그는 자신이 죽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상에는 셀 수 없을 만큼의 능력자가 있다고 했으나 많은 것을 알 필요는 없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고 기형적으로 괴사한 것처럼 뵈는 그의 손은 그가 지닌 능력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다이무스는 그가 어떠한 말을 하고자 하는지 전연 이해해낼 수 없었다.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말들은 바레타의 속에서도 정리되지 못한 듯 싶었고 그는 급박하게 시간에 쫓기는 듯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 다이무스는 식기를 놓았고 턱을 괸 채 맞은 편의 바레타가 입 속으로 꾸역꾸역 음식물을 밀어 넣는 것을 바라본다.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제가 굳이 그에게 말을 걸고자 하는 저의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바레타가 문득 시선을 든다. 식탁 위로 침묵이 감돌았다. 바레타는 손을 뻗어 뻑뻑한 냅킨을 통에서 뽑는다. 그리고 거칠게 입가를 문지르며 다이무스에게 내뱉는다.

  "궁금하다면 죽여봐도 괜찮다."

  톡.

  하고.

  다이무스의 두 다리가 멈춘다.

  삽시간에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아침나절 보았던 시신들이며 그 새서 토악질을 해내던 바레타의 등이 떠올랐고…… 그리고…… 다이무스는 아마도, (정말 아마도)바레타는 제게서 다른 것을 보고 있다는 막연한 상상을 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한참을 고민했다. 다이무스는 고개를 숙이지 않은 채 가운데가 허히 빈 접시에 시선을 고정해 실금처럼 난 흠집의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바레타는 소년의 침묵에 그가 궁금해하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침묵은 무겁지 않았다. 그저 곁가지처럼 온당히 그곳에 있어야할 것처럼 느껴졌다. 1초, 2초…… 그리고 몇 초가 흘렀는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에 대한 기억마저 희미하게 어슴해질 무렵, 소년은 바레타의 손에서 구겨져 탁자 위를 나뒹구는 냅킨을 집어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아니." 자그마한 입 속에서 혀가 이빨을 두드린다. "됐어."

  까딱까닥 소년의 다리는 탁자 아래, 허공에서 시계추처럼 흔들리길 반복한다.

  그래.

  바레타는 입속말로 답한다.

  그래.

  다시 한 번.




노 생각 잼. 원래 글은 의식의 흐름으로 쓰고 술 마시고 쓰고 졸릴 때 쓰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퇴고하는 거라고 했는데 저는 지금 점심을 먹고 싶고 여하튼…… 이번 주 정말이지 이상한 일만 일어나서……


1) 바레타는 불가항력이긴 하지만 계속해 능력을 사용함으로 인해 자연적인 수명의 길이가 점차 줄어들 것 같다. 불사이지만 언제 심장이 멎고 벌레들이 장기 속 쌓여 뒈져버릴 지 알 수 없다. 바레타의 죽음은 매 번 러시안 룰렛 같았으면 좋겠다. 그에게 있어 죽음이란 불발탄이기도 하며, 오발탄이기도 하다.


2) 판타지스러운 설정으로는 더는 늙지 않는 바레타가 보고 싶기도 하다. 여기에 환생 같은 걸 끼얹어서 어린 다이무스를 키우는 바레타도 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다이무스의 성격적 요인들이 대부분 환경에서 나와 본질로 굳어진 거라 생각하기 때문에, 바레타가 키우게 될 다이무스는 분명 이전의 그와는 다를 것이다. 


3) 환생과 육아는 솔직히 그냥 판타지고, 어느날 바레타가 덜컥 뒈져버렸으면 좋겠다. 솔직히 말하는데 바레타는 죽는다기보다는 격한 비속어가 내 속에서는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 죽음이 그렇게 아름다울 것 같지는 않다. 안방에 구더기 대신 꽃이 피진 않아.


4) 바레타가 어린 다이무스를 키우는 망상 이어서. 다이무스가 의자에 앉아 바닥에 닿지 않는 다릴 까딱이며 바레타를 빤히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바레타가 천천히 입술을 열어서: "궁금하다면 죽여봐도 괜찮다,"라고. 그러면 어린 다이무스가 도기 인형처럼 바레타를 몇 분이고 눈썹 하나 꿈질대지 않은 채 응시한다. 바레타도 그를 바라본다. 그러다 슬슬 바레타가 자신이 내뱉은 말들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질 때 즈음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아이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됐어,"하고 작은 대답도 내뱉으며. 바레타는 "그래,"라고 아이에게 말한다. 하얀 양말에 감춰진 가느다란 소년의 두 다리가 허공에서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개인적으로는 "죽여봐도 되나?"라고 진지한 목소리로 묻는 17세 다이무스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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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무스. 실종.

  머릿속에서 쩔걱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뻗어 과연 저 잔을 잡을 수 있을까 가늠하는 데에만도 30초가 넘게 걸렸고 그리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다이무스 홀든은 보이지 않게 허리 께에 붙인 손을 쥐락펴락하며 투명한 찻잔의 온도를 상상했고 그것에 액체를 따르는 여자의 손을 보았다. 여자는 굳이 몸을 일으키고 허리를 살짝 수그려 잔에 차를 들이부었다. 쪼로록보다는 왈칵으로, 그 행위 자체를 일찍이 끝마치고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느낌이 강렬했다. 타라 시바스 조노비치는 소파에 앉는다. 그녀가 미세하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귀에 걸린 귀걸이가 짤랑거렸다.

  "서류는 얼마나 남았어?"

  "45분 분 정도가 남았다."

  "지금 집도 들르지 않고 회사로 나온 게 맞지?"

  목이 칼칼하게 타는 것을 느낀다. 다이무스 홀든은 이 모든 이상을 은닉하고픈 감정 속에 빠졌다. 조노비치는 대답을 재촉하며 다이무스 홀든을 응시한다. 대답을 미루지 않고 그래, 하고 말한다. 빈 수조 안으로 공깃방울이 차올랐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물때가 묻고 수초가 죽은 여인의 머리채처럼 낭자했던 작은 상자였는데 이젠 이름 모를, 독을 품은 것만 같은 빛깔의 열대어들이 그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마를렌과 샬럿이 보고 싶다고 해서. 그 시선을 알아차린 것인지 조노비치가 덧붙였다. 그 아이는 너를 바라보고 지냈잖아. 네가 없으니 다른 볼거리가 필요했던 거겠지. 쓴 말과 쓴 침을 삼켰다.

  기실 이 모든 것들이 어불성설이었다. 다이무스 홀든 스스로도 해명할 수 없을 터였고 그럴 의지조차 없었지만 설령 가능하다한들 타인에게 이해를 받는 것도 용이치 못할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이전과 같은 일상이었다. 많은 것들이 다르지 않고 요철이 알맞은 도장의 뚜껑처럼 정착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조노비치의 마른 손가락이 나무 탁자를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린다. 약지에서 시작된 진동이 검지로 넘어가고 잔 속의 차가 간헐적으로 진동한다. 그녀는 시계 대신 제 심박을 재듯 한동안 다이무스를 바라보았고 다이무스 홀든은 그제서야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조노비치가 바라는 것이 그것이었기에. 그의 손이 정확히 뻗어나가 잔의 바른 곳을 쥐었다. 화한 박하향이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네 동생이 왔었어."

  잔이 입술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녀가 말한다.

  "난리를 치고 갔지. 사실 저 수조도 깨먹어서 같은 걸로 바꾼 것뿐이야. 샬럿은 겁에 질려 끝내 참다 울어버리고 마를렌은 드렉슬러는 같이 싸우고 로라스는 말렸지. 나는 연합으로 청구서를 보냈고."

  "대신 사과하지."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게 그게 아닌 걸 알잖아, 홀든."

  넌 세 달 동안 실종 상태였어. 그게 가출이든 아니든 우리에겐 실종이었지. 조노비치의 말에 다이무스 홀든은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영상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설명을 필요성 또한 상기시키지 못했다. 밀린 분만큼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몇 번의 철야면 끝마칠 수 있다. 다이무스 홀든은 우습게도 이전을 떠올리는 것이 버겁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야기하는 세 달이. 조노비치 또한 한 모금 액체를 들이킨다. 그녀의 루즈를 바른 입술이 입술이 뻐끔 열린다.

  "어디 있었어?"

  다이무스 홀든의 잿빛 눈동자가 여자를 마주한다. 평소 같았다면 상관할 바가 아니라 그녀에게 단호히 잘라 이야기할 수 있었겠으나 그녀에겐 관여할 수 있고 질문할 수 있는 권한이 충분했다. 다만 홀든에게는 대답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무 사감없는 그 시선에 조노비치는 금세 그가 말을 아끼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이무스 홀든은 잔을 놓지 않았고 다시금 한 모금을 머금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실타래처럼 내뱉었다. 아마도, 거짓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 알겠어. 조노비치가 묵인을 관대히 허용한다. 그녀의 손이 홀든의 잔으로 다가갔고 자신의 잔과 홀든의 잔을 쥐었다. 더는 안 마실 거잖아? 말꼬리가 올라간 물음표였으나 다이무스 홀든은 그것이 질문이 아님을 안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줘. 이글 홀든이 내일 또 찾아와 난동을 부리는 것은 썩 달갑지 못하거든."

  생사를 알려. 우리도 놀라우니까. 다이무스 홀든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내 뒤를 돌아본 그녀에게 보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알겠다고 말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문고리를 향해 다가가고 이내 손에 닿는 순간 여상스럽게 돌려연다. 그 소리를 들은 조노비치가 개수대에 잔을 쌓으며 여상스럽게 내뱉었다. 마치 그것이 일종의 농담이나 가벼운 바람처럼 들리기는 원한다는 양.

  "한쪽 눈은 어디 갔어?"

  쾅. 문이 닫혔다.

 

 

 

아, 잠 온다.

 

1) 안타리우스에 납치되어서 실종되었던 다이무스가 돌아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출근했으면 좋겠다. 실종된 당시에 클로닝 등을 위한 자료를 위해 온갖 수모를 다 당했으면. (^-^ ) 아, 모브다무 보고 싶다! 모브다무! 생식 세포! 클로닝! 써느러운 공간에서 제 숨소리와 심장소리만 들린다는 건 노이로제를 불러일으키기 좋은 요소다. 강박적으로 숨을 조절하게 되지 않을까.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나면 급작스레 찾아오는 정적 탓에 불안에 질리고 날숨 뱉기를 꺼리게 되는 정도의. 눈이 후벼파였으면 좋겠다. 다른 눈으로 제 신경다발을 마주하고 헛구역질하는 다이무스가 보고 싶은데 썩 약한 모습을 보여줄 것 같지는 않다. 허한 안방에서 피가 쏟아져 나온다. 남은 찌꺼기를 확인하듯 구멍 속을 더듬어오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발작하다 조용히 쇼크 받고 기절했으면.

 

2) 커플링이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 없다면 이글이 다이무스를 찾으려 든 건 돈이 궁해서였겠지. 드렉슬러가 화를 낸 건 왠 쌍놈이 제 공간에서 지랄을 떨어서였을 거고.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새삼 둘 다 본래는 제법 개인주의적인 캐릭터라는 게 선연하다.

 

3) 한쪽 눈이 없어 자주 비틀거릴 것 같다. 안타리우스에서는 그저 갇혀 있는 게 다였으니 거리감 따위를 인지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는데 일상으로 애써 돌아오려 발악하려니 아무렇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다. 눈을 잃었다는 사실과 안타리우스에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어떤 일을 당했는지 말하고 싶지 않고 되려 수치스러워할 성 싶다. 조노비치의 앞에서 잔을 의연하게 쥐기 위해 머릴 얼마나 굴렸을지 적고 싶었는데 그냥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것도 좋아서 대강 넘긴 것 같다(핑계) 눈치가 좋은 여자여서 괜히 잔 안 집고 있다가 더 들키지 않을까? 맨 마지막에 문 고리 돌리는 것도 어색하게 부각해서 적고 싶었는데…… 모르겠다. 나는 지금 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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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 소주 십팔 잔.

  잔이 바닥 위를 굴렀다. 독하게 코를 찔러오는 역한 술냄새나 갈 곳을 잃은 손이나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팔을 뻗어 늘어진 허리 밑 손을 집어 넣어 그 몸을 일으킨다. 폭신한 벨벳 소파에 파묻힌 어깨가 펴지고 유달스레 머리가 무거운 것인지 관절이 고장난 자동 인형처럼 고개를 주억이길 반복한다. 슴벅이던 눈꺼풀이 반개하고 티미한 조명에 짧은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가 선연했다. 근래엔 단 한 번도 가까이서 제대로 마주한 기억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얀 건반 같은 뺨을 두드리자 후텁한 숨자락이 연주되어 흘러나왔다. 정신 차려. 피부가 뜨거웠다. 가져다 댄 제 손은 평균적인 체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살갗에 닿자 시리기 짝이 없어 써느러운 박빙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가 눈을 뜬다. 언제나 곧았던 그 목이, 시선이 기름칠이 필요한 경첩처럼 삐걱이며 벌어진다. 몇 병을 부은 거야? 내가 누군지는 알아 보겠어? 그러자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도리도리. 야살스럽다. 전자에 대한 대답인지 후자에 관한 것인지 혹은 둘 다인지. 남자가 알딸딸한 취기가 가시지 못한 얼굴로 허리를 숙여 떨어진 잔을 쥐었다. 그는 새로운 병을 연다. 어릿한 불빛에 은닉되었던 빈 병 두어 개가 그 그림자에 윤기를 잃고 드러났다. 줄곧 혼자 마셨어?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인다. 작은 웃음이 목울대를 치고 올랐다. 유순해졌네. 분위기에 취해 내뱉자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두 눈을 둥그렇게 뜬다. 유순해졌다고. 반복해 내뱉자 실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파스스 마른 웃음이 그 입술로부터 흘러나왔다. 지금 내가 어림없는 소리를 한다는 거야, 다이무스 홀든? 화가 난 체 해보지만 들뜬 기분을 감출 길이 없어 말꼬리가 올라간다. 사내는 그러나 더는 제 말을 듣고 있지 않다. 자작하는 그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아 병목이 자꾸만 탁자 위로 기울어지기를 반복했다. 잔이 흘러 넘친다. 손을 뻗어 남자가 쥐려 한 잔을 앗아 표면에 약하게 맺힌 둥근 막을 입술로 걷어낸다. 물처럼 끈기가 없어 손가락 새로 흩어진다. 다이무스 홀든의 입술에 제 입을 댄 잔을 쥐여주며 아랫도리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셔. 다이무스 홀든의 손이 내려간다. 그의 눈이 반쯤 감겼다. 천천히 잔을 기울이자 독한 액체가 남자의 입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고 부러 잔을 떼내지 않아 한 잔은 금세 비워졌다. 입술에서 잔을 떨어뜨리자 쿨럭이며 폐부를 들어낼 듯한 기침을 한다. 입가에 흐른 침을 엄지로 닦아내는 순간 밀려오는 희열에, 바닥에 여럿 금이 간 그 싸구려 잔 속에 뭔가 새로운 세계가 있는 양 느껴진다. 탁자 위 덩그런하니 놓인 병을 쥐어 주둥이를 입에 댔다. 톡 코 뒤편을 아리게 쏘는 액체가 입 속에 들어찼다. 남자의 시선이 멍청하다. 혀를 움직일 수 있을 법한 공간을 남겨둔 채 볼이 부풀어오를 정도가 되어서야 병나발을 멈추고 그 얼굴을 쥐었다. 여전히 그 뺨이 화상을 입은 듯 홧홧했고 내 손마저 시렸다. 코끝을 비비적대다 입술을 겹치자 어색하게 굳어진다. 뺨을 쥐던 손으로 그 코를 집자 숨을 내뱉지 못한 입술이 벌어졌다. 마주 댄 입술에서 젖어 질척한, 꿀렁대는 소리가 났다. 거 봐, 유순해졌다니까. 알코올이 그 깊은 목구멍으로 죄 넘어가고, 그제서야 취기를 견뎌낼 수 없다는 듯 고개가 마주한 어깨 위로 떨어진다. 그가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낸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꼭 딸꾹질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글 홀든…… 띄엄하게 단어가 이어진다. 왜? 당장이라도 그를 발가벗겨 소파에 찍어누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어깨에 상반신을 기댄 그의 뒷목을 지분대며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잠이 온다. 남자가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좀 자. 더는 그의 살갗을 지분대는 내 손이 차지 않았다. 그의 몸뚱어리가 이상스레 뜨숩게 느껴지지도. 아, 내가 취했구나. 그제야 그런 생각이 불현 듯 밀려왔다. 나 또한 그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궜다. 천천히 감기는 눈꺼풀이 지독하고 달게 무거웠다. 다이무스 홀든. 그는 대답이 없다. 나도 졸려. ……투정.

 

 


18잔이면 2병하고 반 병 정도니까 그냥 두 병은 병 두어 개 묘사로 삥땅쳤어요~! ヽ(。◁゚)ノ

나머지 반 병은 입으로 먹여줘야지~! 하면서 적었습니다. 십팔…… 알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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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렉다무. 어린 왕자. 우주.

#

  "너도 그거 키우냐? 장미."

  "장미?"

  "그, 책에서 유리 덮개를 씌워서 키운다던."

  "장미는 키우지 않습니다."

  큼큼한 토사물 냄새가 비강으로 파고든다. 휠체어가 조금식 나아갈 때마다 널부러진 빈 병들이 짤그럭 소리를 내며 방구석 어딘가로 굴러갔다. 이래서 애새끼들은. 그는 짜증스럽다. 뭔 술을 뒈질 만큼 처마시고 앉아 있어. 쯧하고 자연스럽게 혀를 차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다이무스 홀든이 갈색 유리병을 줍는 것을 드렉슬러는 바라본다. 드렉슬러를 제하곤 유일하게 멀쩡한 인간이었다. 술을 아예 입에 대지 않은 것인지 드렉슬러의 휠체어 바퀴 근처의 병을 줍기 위해 고개를 숙인 그의 목덜미에서는 저릿한 알코올의 향조차 나지 않았다.

  "그럼 뭘 키우는데?"

  "먼지를 키웁니다."

  내 머릿속에는 먼지가 살고 있어요. 그렇게 대답하며 다이무스 홀든은 검지로 제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드렉슬러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다. 뭔 좆같은 신종 개소리야, 이건.

  "장난해?"

  "장난이요?"

  드렉슬러는 그 말에 잠시간 입을 다문다. 그는 청년에게 장난이라는 단어가 썩 어울리지 않다는 것을 그 반문 한 번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젓는다. 다이무스 홀든은 말없이 다리오 드렉슬러를 바라보다 품에 그득한 맥주병을 분리수거 통에 처넣었다. 와자자하고 밑에 깔려있던 종이들이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이무스 홀든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는다. 유리를 종이 분리수거함에 넣은 모양이다.

  "잘못 넣었네요."

  "멍청한 새끼. 그냥 냅둬."

  다리오 드렉슬러는 뒷목을 긁적였다. 야, 너 휠체어 밀 줄 아냐?


#

  여기 작은 상자가 있다. 언제부터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자. 이 상자 속에서 남자는 수천 수 만 번의 공전과 자전을 경험했고 이제는 식어빠진 행성의 일부분을 삼켜냈다. 이따금 전동 휠체어의 모터소리가 들려온다. 건너편의 천장에 빛으로 이루어진 실금이 쳐진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커튼 너머의 하늘이 이 때 즈음이면 의례적으로 밝아오는 것을 안다. 책상 위에 얹어진 시계가 새벽 6시를 지나고 있다. 손가락을 한 번 까딱이자 방을 메우던 우주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소실된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자꾸만 청년에 대한 것들이 제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음을 느꼈다. 저 자신만이 그를 추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청년이 그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는 팽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다리오 드렉슬로 속의 청년은 우주 그 자체가 되어 점점 자신과의 거리를, 지구와의 거리를 거부한다. 빈 강의실의 한 자리에는 책장조차 자리하고 있지 않았고 고작해야 종이로 접은 학이 그 위에서 가끔 바닥으로 나뒹굴었을 따름이다. 입 안이 소태처럼 썼다. 그는 눈을 뜨면 자신이 12년 전의 병실에서 눈을 뜨지 않을까 이젠 생각한다. 사실은 다이무스 홀든을, 만난 적도 없었다고. 자신은 이미 죽어 있다고도.


#

  너, 나랑 자자. 네. 씨발, 존나 밸없는 새끼. 자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넌 그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냐? 어렵게 하신 거 아니까 이러는 겁니다. 너 근데 그때 뭐 보고 있었냐. ……네? 시험 때. 우리 처음 봤던 때. ……강의 시작했던 날 처음 뵀습니다. 아, 씨발. 중간고사 때 말하는 거 아냐, 지금. ……달 보고 있었습니다. 백주대낮에 시험칠 때 달이나 찾고 인생 좆나 재미있게 사네. 지금도 재밌네요. 야. 네. 올라와 봐. ……. 쪽팔리니까 나 그만 쳐다보고 올라와 봐. ……. 나 다리병신이거든.


#

  그러고 보니 다이무스 홀든은 참 급작스럽게도 그의 삶 속에 등장했다. 지루하고 무료한 입맷거리 같은 문제지들을 돌리며 다리오 드렉슬러는 내일은 꼭 휠체어의 방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작대는 종잇장 소리가 유난하게 거슬렸고 그는 제가 낸 시험 문제조차 기억해낼 수 없었다. 그저 천개처럼 열린 강의실의 유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젯밤만 해도 리라가 광명하던 그곳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정확히는 구름 한 쪼가리가 부유하고 있었지만 드렉슬러는 그곳에서 많은 의미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돌린 시선으로 문득 청년이 달려들었다. 그는 0.3mm의 샤프를 손에 쥔 채 곧게도 앉아 있었다. 그는 다리오 드렉슬러가 응시하던 하늘을 보고 있다. 어쩌면 돔의 철골의 녹을 세고 있는지도 몰랐고 천체를 묻는 시험지의 답이 천장에 걸려 있으리라 생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녹색 레이저 포인터를 청년의 시험지 위로 쏘았다. 문제가 쉬워? 집중해, 이 자식아. 유치한 항의의 의미를 담은 장난질이었다. 청년은 그러나 저리에서 일어났고 몇 마디 적히지 않은 시험지를 드렉슬러의 책상 위에 뒤집어 얹어놓으며 간단히 목례했을 따름이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이상스럽게도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나가 청년의 어깨를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청년의 얼굴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수려하고 억센 인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물처럼 지워진듯 드렉슬러는 청년의 존재 자체가 희미하다고 느꼈다.

  드렉슬러는 손을 뻗어 엎어진 시험지를 손가락 한 마디 만큼 들추어낸다. 다이무스 홀든. 이름자가 선명했다.


#

  식은땀이 흥건하다. 눈을 떴다. 씨발스러운 인생. 능준한 분의 악몽이 쉴새없다. 침침한 방 안에 다시 우주가 그득 찬다. 플라네타륨의 별자리가 다리오 드렉슬러의 얼굴에도 맺힌다. 그는 손 안에서 절걱이는 총신을 한심스럽게 바라본다. 탄창이 비었다. 여분의 죽음이 그의 침침한 뇌속으로 도틀어 밀려온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안주한 이 좁은 상자 속에서 드렉슬러는 자꾸만 죽은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사고로 다리를 잃었다. 꿈을 포기했다. 매 번 마주하는 꿈 속에서 자신을 그러안은 어머니의 팔은 굳어져 철창처럼 저를 가두었다. 그는 멍청하게 누군가가 어머니의 팔을 톱으로 잘라내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것을 구출이라고 이야기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무딘 가위날로 제 귀를 집었다 놓기를 반복한다. 왜 자꾸 이 목소리들은 제가 말을 거는 거냐며. 그는 아무런 장비 없이 우주로 내던져진 기분이 든다.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체내의 수분이 증발하고 그는 시리얼 속의 건포도 짝이 되어 더는 드렉슬러라 이야기 할 수 없는 형태의 고체가 되는 것이다.

  척추를 타고 밀려와 발끝까지 유실시키는 고통에 안추르며 그는 다이무스 홀든의 어깨를 붙잡았다. 청년이 허리를 숙여 다리오 드렉슬러와 고개를 마주한다. 난, 어릴 적부터, 우주를 날아다니고 싶었어. 다리오 드렉슬러가 고개를 숙인다. 두 손에 얼굴을 묻는다. 그는 자신이 나약하다고 생각했다. 너무도 나약해서…… 어쩌면 그 누구도 지켜낼 수 없었다고. 자꾸만 갓 파낸 우물처럼 솟아오르는 변명에 자괴하며 그는 그만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 그 기분 아냐? 다리가 너무 무거운 거야. 그래서 하얀 침대 위에서 팔로 몸을 일으켰는데…… 일으켰는데…… 몸을 돌친 순간 바닥으로 머리부터 처박히는 거지. 다리가 사라진 기분. 죽지 않을 만큼의 진통제를 맞고서야 사람 말을 할 줄 알게 된 기분 말이야. 다이무스 홀든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그가 저를 동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머릿속에는 모래시계가 있어."

  흘러내려, 자꾸만. 자꾸 흘러내려. 코랑 입에서 자꾸만 흘러나와. 천구도 나도 그대로인데 주변은 세차 운동을 반복해. 겁쟁이. 머릿속의 목소리가 자꾸만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멎는다. 다이무스 홀든의 손이 그의 귀를 틀어막는다. 차다. 우주처럼. 드렉슬러는 몰래 감은 눈으로 그의 입술을 훑었다.


#

  넌 왜 그리 은밀히도 나를 방문했는가에 대해.




조각글 순서를 일부러 섞어놓았어요. 원래는 맨 마지막 문장으로 시작해서 다이무스 홀든을 만난 적 없다는 조각글로 끝이 나야하는데(머슥). 믹향 님의 천문학자 드렉슬러와 돌돌 님이 주신 드렉다무 키워드 '몰래' 생각하면서 어제 썰 풀었던 거 듬성듬성 추렸는데 (t_t ) 죄송합니다…… 아래 썰들은 썰계 거랑 위 내용이랑!


1) 몰래 왔다가 몰래 간 다이무스 홀든. 어린 왕자같은 다이무스 홀든. 다이무스가 어느날 나타났던 것처럼 어느날 사라졌으면. 드렉슬러는 그의 말을 기억한다. 내 머릿속엔 먼지가 삽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숨은 달을 찾던 소년은 자신의 머릿속으로 돌아갔다. 그는 태초의 먼지가 되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저린 다리를 두드린다. 


2) 믹향 님이 말씀하신 천문학자 드렉슬러가 너무 좋다… 우주비행사가 꿈이었다니 엄청나다… 저는 기왕이면 다리를 못 쓰게 되어 꿈을 포기한 게 좋네요. 히스테릭한 괴짜 교수였으면 좋겠어요. 휠체어의 뒷주머니엔 언제나 주먹만한 플라네타륨과 녹색 레이저 포인터가 자리하고 있다. 드렉슬러는 자주 망원경 앞에서 잠들었다.


3) 너도 장미를 키우나? 드렉슬러는 다이무스 홀든에게 묻는다. 별자리가 그득한 야공을 응시하던 홀든이 고개를 돌린다. 장미? 그, 책에서 유리 덮개를 씌워 키운다던. 키우지 않습니다. 뭘 키우는데? 먼지를 키웁니다. 장난해? 아뇨. 맨 처음에 드렉슬러는 선문답이 이어지면서 이 좆같은 애새끼는 뭐지; 이랬으면 좋겠다.


4) 너무 우울한 날이 있어서 교수실에서 자꾸 빈 권총의 공이치길 절걱인다. 아직 방석도 사지 않았는데 내일은 총알을 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문득 다이무스가 한 말이 떠오른다. 내 머릿속엔 먼지가 삽니다. 증식합니다. 다음날 드렉슬러가 다이무스에게 말했으면 좋겠다. 내 머릿속에 모래시계가 있어. 흘러내려. 자꾸만. 흘러내려. 그러면 다이무스는 전동 휠체어를 괜스레 뒤에서 미는 거야. 드렉슬러는 그게 배려인 걸 안다. 그는 다이무스에게 지금의 표정을 감추고자 했다.


5) 교통사고. 경직된 어머니의 시체. 아직도 척추가 아프다. 고통스럽다. 다이무스에게서 위안을 얻고자 한 것인지 혹은 그에게서 또다른 형태의 음울을 보고 이끌린 것인지 드렉슬러가 멍청하게 플라네타륨을 껐다 켜기를 반복하며 고민했으면 좋겠다. 멀쩡하게 딸칵대다 버튼이 고장났으면 좋겠다. 기분이 좋지 않다. 다이무스 홀든에게 산책을 가자는 말을 건네기까지는 참 오랜 망설임이 필요했다. 드렉슬러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야, 허리 좀 숙여봐 이러곤 다이무스에게 키스했으면 좋겠다. 다이무스는 싫은 표정도 좋은 표정도 아닌데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는 게 드렉슬러에게 선연하게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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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슬다무. 선명한 변화. 유일한.

  난잡하게 속을 채우고 나면 소설 속에서나 언급되는 상실감 따위가 밀려오지도, 특별히 감정적으로 변하지도 않았다. 내가 갓 6학년이 되었을 적 네가 1살이었다는…… 그런 통상적인 나이 계산법에 이외의 모든 터부에 망설대던 순간순간이 멍청스럽게만 느껴졌다. 너는 아직 멀건 종이풀처럼 내 손끝에 엉겨들었다. 무덤덤한 얼굴로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던 너는 야살스러운 미소도, 색스러운 신음도 내뱉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나는 어렸던─그러니까 음모가 갓 푸르게 자라기 시작했던─너를 안으며, 아마도 울었던 것 같다. 문득 나의 방으로 찾아든 내가, 설움에 잠긴 나를 보며 지은 표정이 구원처럼 박혀들었고 인화되었다. 벗어둔 투박한 코트 속에는 손때조차, 아니, 지문 한 번 찍히지 못한 무거운 죽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무엇을 바랐는지 모르겠다. 너를 그리 무참히 찢어발겼던 싱그러운 여름밤 불구하고 죄책감에 떨지 않았던 나는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을 예측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손에 쥐게 된 총신이 그토록 써늘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나는 겁에 질렸고 네게 입을 다물었다. 너는 내가 잠든 사이 방을 빠져 나갔다. 분홍빛 정액과 점점하게 핏방울이 찍힌 흰 수건은 허물처럼 빨래통 속에 유기되어 있었다. 나는 그날 이후 너를 일주일 간 만나지 못했다. 너는 나를 피해다녔다.

  다시금 너를 마주했던 때 즈음엔 무엇인가 천천히 달라지고 있었고 너 또한 그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성처녀가 아니게 된 너는 조금 더 자주 내게 안겨왔다. 하지만, 너는 어째서…… 어째서 내게 묻지 않았나. 그 모든 침묵에 대해, 내 모든 어리광에 답하면서도 그 입술을 어째서 침음을 삼키고 막힌 숨을 토해낼 적에만 뻐끔댔나. 그것이 여즉 짜증스러웠다. 나는 키가 자라는 너를, 수염이 돋아나는 너를 지켜본 유일한 이였다. 그것에 대한 같잖던 보상을 바라지는 않았으나 하다못해 나는 네개 내가 특별하기를 바랐다.

  빠르게 눈 앞을 스쳐가는 클레이볼을 단 한 발로 터뜨릴 수 있게 된 즈음의 나는 누군가를 살해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이라도 된 양 굴기 시작했다. 교실 안, 지겹도록 재잘대던 애새끼들의 입 안에 총구를 쑤셔넣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내 방식의 변화였다. 무척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하굣길 빗구덩이에서 기어나온 길가의 지렁이 하나 밟아 죽이지 못하는 녀셕이었다. 그러면 너는 허리를 숙여 묵묵한 얼굴로 탈수되어 움찍대는 것밖에 하지 못하는 그 무력한 녀석을 집어 화단에 던져 넣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어째서. 그래, 어째서. 자꾸만 뇌까리나 네가 없다. 들어줄 네가 없고 안겨줄 네가 없다. 그게 참…… 그랬다. 여전히 나는 현재를 믿지 못해 검은 열가소성 플라스틱 그립을 쥔 손을 내려다보고 자주 조소한다. 첫번째는 네가 나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두번째는 내가 전지전능한 구세주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세번째는…… 쉬이 뒈져버리는 그 가벼운 목숨들이 더는 두렵지 않다는 것에.
  슬로언?

  …….

  ……웨슬리?

  ……그래.

  선명한,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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