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렉다무. 선행성 기억상실증.

  다이무스 홀든은 고개를 든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 종잇결을 살린 벽지는 가끔 파도처럼 그에게로 밀려왔으나 천천히 멀어져가기를 반복했고 방의 한 모퉁이는 아주 가끔 녹아내릴 듯 출렁였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덕지덕지 악착스럽게 천장에 들러붙은 메모장 하나가 팔랑이며 잎새처럼 떨어진 것도, 하필이면 그 종잇장이 그의 잠을 깨운 것도 무척이나 우연스러운 일이었다. 손바닥의 누런 메모장은 물론이거니와 그곳에 적힌 단어들의 나열에 다이무스 홀든은 탁자 너머로 팔을 뻗어 천착스럽게 비명을 지르는 알림 시계를 내리쳤다. 그는 박제된 시간의 방에 갇혀 있었다. 그 세계에서는 다리오 드렉슬러의 이름이 하늘하늘 내렸다.
  중력을 거스른 낙엽처럼 천장에 쌓인 그 이름들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킨다. 어제가 1940년 9월 며칠이었다는 것을 알리는 메모지는 버려진 숲은 나무처럼 햇빛을 휘두르고 있었다. 전쟁 중. 메모지에 적힌 글자에 그는 박물관을 둘러보듯 자신의 방을 찬찬히 돌아본다. 어제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메모장을 붙인 기억이 없다. 툭하고 리본을 끊어내듯 어색한 이음새는 전연 없었다. 그저 하룻밤 새의 마법과도 같이 이 모든 것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불구하고 어째서 이리도 익숙한가.
  창밖은 폭풍의 눈처럼 고요했고 다이무스는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띠지를 감흥없이 훑었다. 자신의 책상 위 쌓인 종잇장들을 집어 치읽기를 반복―그것은 그의 일기장이자 편지였다―하다 마침내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얼음장처럼 시린 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고 뺨을 쳤다. 손에 익은 감촉과 나즉한 익숙함. 수건에 얼굴을 문대고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늦게 일어났네."
  거울 너머서 다리오 드렉슬러가 손을 흔들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놀란 기색을 비치지 않으려 애썼으나 홉뜬 눈만은 감출 수 없었던 것인지 드렉슬러는 경박하게 웃었다. "놀랐어?" 그는 그러다 이내 친절하게 덧붙인다: 어제의 너는 문을 잠그지 않고 자기로 했으니까. 다이무스 홀든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째서?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다이무스 홀든이 그 사실을 다리오 드렉슬러에게 알렸을 이유란 무엇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운 와중 다이무스의 책상으로 다가간 드렉슬러가 구덩이같은 책상을 헤집기 시작했고 그 새서 손바닥에나 들어갈법한 가죽 수첩을 찾아 다이무스에게 건넸다.
  "아마…… 네 일기일 건데, 확실하지는 않아. 너는 매일 밤 적은 모양이고 매일 아침 읽는 모양이던데 내가 보려고 하면 늘 말렸으니까."
  어정쩡하게 그것을 받아 든 다이무스가 수첩을 펼친다. 손때조차 묻지 않게 보관한 흔적이 역력했다. 날짜들을 읽어내는 순간 그러나 드렉슬러가 한손으로 수첩을 엄권해버린 탓에 다이무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퍽퍽한 소리와 함께 닫힌 수첩에서 튀어나온 공기가 눈을 찌른다. 무슨 짓이지, 다리오 드렉슬러.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다이무스는 말한다.

  "하루종일 보고 있을 것이 뻔하니까. 그래, 이렇게 하자. 어제 기억 나?"
  "……그래."
  "글림듀에서 습격을 당했겠지. 근데 지금은 다친 곳이 없잖아."
  "……"
  "흉터만 남았을 걸. 몇 년이 흘렀는데."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투창을 쥐고 있던 남자의 투박한 손이 다이무스 홀든의 뱃거죽을 매만진다. 들어올린 옷자락 새로 옴폭 패인, 살점이 떨어져 나간 상처가 적나라했다.

 

 

 

1) 글림듀 사건 이후 기억을 잃고 WW2로 들어선 다이무스가 보고 싶습니다. 드렉슬러와 함께였으면 좋겠어요.

이글다무. 천재와 범재.

  그게 안 돼? 천진하게 물어오던 아우의 눈에서는 물이 덜 빠진 풀비린내가 났다. 다이무스 홀든은 몇 번이고 굳은 살이 박힌 제 손을 쥐었다 펼치며 바닥에 널부러진 가검을 바라보았고 그 곁에 있는 아우의 검은 신으로 시선을 옮겼고 이내 그의 핏기없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마주했다. 목이 아닌 뱃구레서부터 치밀고 올라오는 허한 웃음이 이글 홀든의 목울대를 울린다. 실성한 듯 낄낄대는 그에 다이무스 홀든은 허리를 숙여 말없이 자신의 가검에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이글 홀든의 신발 뒤축이 다이무스의 손목을 짓밟는다. 
  "……이글 홀든, 발을 치워라."
  추억으로 가공된 어릴 적의 물음이 어째서 이제 와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글 홀든의 구둣굽이 칼자루와 다이무스 홀든의 손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점차적으로 가해지는 힘에 다이무스 홀든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의 아우를 바라본다. 허리를 숙였던 탓에 고개를 올려 이글을 마주하고 있었다. 어째서 이 상황이 그리도 유쾌한지. 헛웃음을 터뜨리던 이글은 발을 떼지 않은 채 허리를 숙인다.
  "이 좆같은 상황을 나한테 설명해봐."
  상스러운 말본새에 언제나 딴죽을 걸곤 했던 제 형은 꿀먹은 벙어리라도 된 양 아무말을 않는다. 그는 그저 이글 홀든을 바라보았고 칼자루를 더욱 거세게 쥐었을 따름이다. 형이 왜 이렇게 작아 보이는지 모르겠어. 베시시 끌어올린 입꼬리 속에 감춘 언어들이 포악하게 날뛰고 있었다. 우악스럽게 짧게 쳐올린 다이무스의 뒷머리를 거머쥐고 제 앞으로 끌어당긴 이글은 더 이상 미소 짓고 있지 않았다. 
  "말해."
  형은 사실 나를 처음부터 이길 수 없었던 인간이었던 거라고.

하랑다무. 그의 검. 앗아버릴.

  사자라고, 생각했다. 클론들은 목울대를 관통한 검이 핏물을 뿌리며 포장되지 않은 땅 위 하얀 자욱을, 그리고 검은 액체를 남겼다. 의미없이 도륙된 대지 위 배를 드러낸 채 패배한 짐승처럼 우짖던 소년은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보았고 사내는 그리 크지 않은 몸짓으로 제 검을 허공에 털어내며 상황을 반정했다. 간헐적으로 바릊대던 자아 없는 생물체들의 손가락을 짓잛은 구둣발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검이 떨쳐낸 핏방울을 고인 그 드넓은 웅성이가 잠식한다. 여전히 뉘의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체액들이 너절하게 철벅였고 소년은, 하랑은 그런 그의 뺨을 속눈썹 새로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초점을 잡지 못한 시선이 아무렇게나 내리 꽂힌 것에 가까웠다. 위에서 아래로 닿아오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위압감 따위는 더는 안중에도 없이, 하랑의 귓가에 음습한 목소리가 안타까운 충동을 속달했다. 아해야, 그의 검을 앗아버리려무나. 그 막연한 감정은 밀유하는 양심을 떨쳐낸, 과거의 아이마저 꾀어내지 않았던가. 신당의 문을 열게 하지 않았던가. 불구하고 어째서 여즉 이리도 다디단 것인가. 그 막연한 감정을 수 십 번이고 답습한 손을 마침내 이겨내지 못하고 뻗었다. 손금에 닿은 날은 축축하게 젖어 있어 쉬이 잡히는 법 없었고 하랑은 조금 더 손을 뻗기 위해 밭은숨을 쉬었다. 덜렁이는 엄지가 제 것 같지 못했다. 멀어지는 검날을 어거지로 쥐어 잡은 손바닥 또한 꺼끌댔다. 두 줄기 자상에서 더는 빠져나오지 않으리라 여겼던 핏줄기가 걸쭉하게 흘러나와 검끝을 타고 소년의 가슴팍 위로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하랑은 사내가 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소년의 생존을 묻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는데, 검을 잡아당겨 소년의 손아귀로부터 갈무리하는 대신 희미하게 호흡하는 그 빈사상태의, 아직의 어린 과도기의 신체를 무연히 내려다 보았을 따름이다. 하랑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더욱 거세게 검날을 그러쥐었다. 이 손을 떼는 순간 사내는 필시 저를 유기한 채 멀어져 갈 터였고 코끝을 맴도는 비냄새는 실체화되어 추깃물(혹은 자신)을 씻어내릴 것이다. 앗아버리려무나. 구원을 기대하지 말거라, 앗아버리려무나. 머릿속을 울리는 신언이 지독했다. 소년이 천천히 눈을 떴다. 피가 엉겨 분간할 수 없는 눈꺼풀이 열리자 멀건 소년의 흰자가 드러났다. 그 낯빛과는 너무도 달라 마치 다른 것을 떼어다 붙여놓은 듯 이질적이었다. 사내는 소년의 검은 동공을 말없이 들여다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야 소년은 손아귀의 힘을 풀어냈다. 사내는 천천히 발도했던 검을 제 검집에 밀어 넣는다. 일어나라. 하랑은 그것이 눈앞의 마른 입술에서 튀어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신령의 속살임인지 사내의 나즉한 딴죽인지 잠시간 고민했다. 멍청하게 두 눈을 껌벅대고 있자니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다. 네 피도 아니지 않은가. 재색을 띤 먹구름이 자비없는 해일처럼 하늘을 집어삼켰다. 금세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물방울은 눈두덩을 타고 눈구석으로 흘러내렸다. 빗물에 닿은 손바닥이 그제서야 쓰라려오기 시작했다. 아, 그래, 그랬지. 푸슬푸슬 튀어나오는 헛웃음에 사내는 심경한 미치광일 바라보듯 한다. 하랑은 대소했다. 형씨한테 반할 것 같아. 숨이 넘어갈 듯 꺽꺽대며 내뱉은 말이라곤 그게 고작이었다―나랑 내기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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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다무. 어린아이로 족했다.

  어느새 콧속이 간질간질해지기 시작했다. 봄이 올 조짐이었다. 나는 자주 재채기하며 코를 풀었고 창문에는 누런 꽃가루가 그악스럽게 들러붙어 부연 세계를 만들어냈다. 회사의 어른들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간격이 생겼다. 그들은 다투지 않았으나 대화가 줄었고 서로의 몸에 부딪히는 것에 조심했다. 책상의 아래서 발 끝이라도 부딪히는 찰나엔 다들 토막난 사과를 내뱉기 일쑤였다. 아버지는 가끔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나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체 고양이처럼 고롱댔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새로운 비밀을 갖게 되었다. 샬럿과 나는 외출을 금지당했고 샬럿은 회사 앞에 던져진 능력자들의 시신을 보고 헛구역질을 했다. 경고였고 일종의 전시 효과를 노린 것이라 어른들은 어려운 단어를 섞어가며 젠체하기 바쁜, 그래, 아직은 겨울이었다. (솔직히 말해, 정말이지 교양 없지 않아요? 잔망스럽기 짝이 없죠. 그런 더러운 걸 제 앞에 던져놨다고요! 이게 말이 돼요?) 나는 비밀이 생긴 것 외에는 별다른 조짐이 없었다. 슬플만치 나는 그대로였다.

  나는 아저씨가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샬럿은 그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꾸만 내게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느냐 물었다. 좋아서 그래, 좋아서. 희미한 핏자욱이 말라붙은 일회용 면돗날을 하얀 봉투에 넣어 품에 갈무리하며 샬럿의 손을 잡았다. 아저씨의 턱에 난 작은 생채기에는 살색 밴디지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는 가끔 제 뒷목에 묻은 쉐이빙 폼을 잊어버리고는 했다. 샬럿은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조막만한 작은 손이 자꾸만 꼼지락댔으나 그녀가 손을 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샬럿을 토닥였다. 다 괜찮아. 응, 언니. 마법처럼 사르르 녹아내린 아이는 술에 젖은 각설탕 같았다. 불을 질러보고 싶을 만치.

  그가 보관하는 여분의 물품들에는 마음대로 손을 댈 수가 없었지만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쯤이야 이런 때엔 쉬이도 가능했다. 아저씨와 멀리서 눈이 마주쳤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입술을 벌림과 동시에 내 뒷목을 손가락질하며 그에게 말했다. 아-저-씨, 여-기-거-품! 그는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제 살결을 만지작대다 묻어난 하얀 거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품 속의 면돗날이 가슴을 무디게 짓눌렀다. 아저씨, 독순술 할 줄 알아요? 문득 그런 질문이 떠올랐으나 그는 이미 나무 문을 열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언제나 이렇게 한 발이 늦곤 했는데, 봄이 올 조짐, 그 괘씸한 계절풍이 불고는 이런 때가 더욱 잦아졌다. 샬럿은 내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나는 구색을 위한 액자조차 걸어두지 않은 복도를 그녀와 함께 비눗방울을 불며 내달렸다. 우리는 어린아이로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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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다무. 죽음. 함께.

  "아찔하게 상반신을 드리우는 순간 잡아채는 손길이 좋았던 건지도 모르지."

  부르튼 입술이 나즉하게 이야기한다. 환상처럼 자리한 마천루가 더는 자물쇠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옹졸한 심장 속에서 산산조각 났다. 바람이 분다. 언제부턴가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혓바닥 위를 노닐었다. 히카르도는 조소했으며 다이무스는 그가 내뱉는 말들에 다만 경청했다. 그는 생각 후 말을 내뱉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여과없이, 결궤된 방죽처럼 쏟아내는 말들이 다이무스 홀든의 등 뒤에 날붙이를 찔러넣고 있었다. 히카르도는 제 턱 아래까지 잠긴 단추를 풀어내며 계속해 말을 이었다. 날 봐. 눈 돌리지 마. 여기 있는 나를 봐. 갈급하다기보다는 일종의 협박에 근이했다. 다이무스는 자꾸만 떨어지는 시선을 다잡는다. 눈 앞의 어린 사내가 처연하게 웃는다. 그의 허연 옷자락 아래 은폐되었던 교흔이 선연하게 동공 속으로 달려들었다.

  "습관적으로 자살했다."

  "……"

  "당신을 얻고 싶었으니까."

  다이무스 홀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쁜 버릇이 들었어. 덧붙이는 말이 소태와도 같이 쓰다. 그 어리광을 받아준 당신을 원망해. 죽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나를 끌어당긴 당신이 미워. 미워서, 너무 싫어서…… 어릴 적으로 되돌아 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그리고 히카르도 바레타는 마지막 문장을 삼켰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순간이 찾아오면 다이무스 홀든은 저를 껴안았다. 유실된 체액에 화급히 그 목덜미를 물어 뜯는 순간에도 머리를 쓰다듬으며 저를 탓하지 않았다. 히카르도는 이제 와 그 모든 것들이 끔찍스겁게만 여겨진다. 여우처럼 길들여진 죽음이 아닐까. 훈련되어 더는 이성적이지 못한 괴물이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히카르도 바레타는 한 걸음을 옮겨 다이무스에게도 다가갔다. 고개 숙여 그의 귓불에 제 뺨을 비비며 또다시 타성이 되어버린 응석을 부렸다. 언제나 불공평한 게임이었다. 그에게는 남은 것이 없었고 때문에 잃을 것이 없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애초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 되었다. 히카르도가 바라보는 것은 필시 다이무스 홀든 너머의 도시 전경이었다. 붉은 지붕과 흙, 그리고 대리석의 빛깔이 명정한 그의 공간.

  허리를 마저 숙여 다이무스의 뺨을 그러쥔다. 설태가 낀 혓바닥이 치열을 훑는다. 난간에 닿은 남자의 허리가 뒤로 휘었고 히카르도는 손에 더욱 힘을 준다. 죽어줘. 그 입술을 다이무스는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무거운 머리가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함께 죽어줘. 등을 그러안은 손이, 여느때보다도 악착스러웠다. 마치 포태된, 어린 포유류처럼. 그의 마지막 죽음에 다이무스 홀든이 함께하지 못한다면, 다이무스 홀든의 마지막 죽음에 자신이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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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 장난.

  싸구려 플라스틱 안경테가 달그락대는 소리를 냈다. 다이무스는 피로한 눈을 잠시간 검지 끝으로 두어 번 굴려부며 목을 돌렸다. 노트북의 공회전 소리가 유난한 저녁이었다. 어렴풋하게 스민 빛으로 지금이 몇 시인가를 가늠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기중에 떠도는 레토르트 식품의 자극적인 냄새는 사내 둘이 꾸릴 수 있는, 제법 적당하게 퍽퍽한 생활을 들려주고 있었다.
  말캉한 수면 바지를 입은 채 침대 위에 엎드려 업무를 보고 있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어 이글은 말아올린 머리카락을 두어 번 잡아 당기며 다이무스에게로 다가갔다. 빨래 내일 돌려도 돼? 잠시 고개를 돌려 이글을 바라본 다이무스가 대답한다. 상관없다. 몇 초만 응시하고 있어도 머리가 핑핑 돌곤 하는 숫자들에는 흥미가 없었다. 이글은 단순히 그를 괴롭히려는 셈평으로 침대 위를 가로질러 누웠다. 머리에 닿아온 남자의 등은 딱딱했고 그러나 퍽 날렵하게 휘어 있었다. 얇은 옷자락이 입술처럼 찹찹했다. 손끝으로 척추를 더듬어 올라가자 이내 허리를 비틀며 단호하게 그만하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이글이 키들댔다.
  "할 거 계속 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더는 가벼운 어린아이가 아니라 일갈하려던 입술을 결국 다물고 만다. 무게감에 숨이 턱하고 막혀왔으나 이글을 쫓아내는 것이 더욱 성가신 과정을 동반하리라는 판단 하에서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고 정말로 이글이 귓가에 불어넣는 실없는 말들을 무시한 채 차트만을 들여다 보았다.
  여전히 공회전 소리, 달칵이는 마우스의 소음…… 이글은 그 모든 것들을 다이무스의 등에 귀를 댄 채 투과시켜 느꼈다. 더욱 가까이서 소리를 들어보겠다는 듯, 가슴 께로 파고든 손이 더욱 그 몸을 그러 안았다. 갈비뼈, 유륜, 골반이나 배꼽 따위의 것들. 손톱 끝에 닿아오는 것들에 집착하듯 이빨을 목덜미에 세우자 다이무스의 마른 아랫배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세계가 180도 뒤집혀 있었다.
  아릿하게 퍼지는 둔통에 이글은 그제야 자신이 침대에서 떨어졌다(밀쳐졌다)는 것을 깨단했다. 골이 당겨 왔으나 퍼석한 웃음이, 멍청하게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이무스 홀든은 이글을 내려다보지 않은 채 여전히 손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이글은 윗몸을 일으켜 제 형이 몸을 뉘인 침대의 매트리스 위 턱을 괸다.
  "많이 남았어?"
  "너와 놀아줄 수 없을 만큼은 남았다."
  "그럼 내일 해. 주말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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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다무. 호의.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까. 그래, 사내는 새로 부임해온 문학 선생이었다. 아이들은 그를 로라스라 불렀는데 수업을 할 때를 제하곤 지독한 에스파냐식 발음이었던 그는 자신을 알베르토라고 소개했다. 다이무스 홀든은 그를 제법 좋아했다. 단순한 동경보다는 손이나 뺨에 혀를 대보고 싶다는 약간은 일그러진 형태의 것이었다. 그는 또 알베르토 로라스의 곁을 맴도는 작은 요정을 좋아했는데, 그것은 푸른 빛깔을 띤 여인이었다. 그녀는 늘 하이얀 꽃잎과 노오란 꽃술을 한 백합을 뜯어먹고 있었다.
  밤이 길었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요정을 바라보며 다이무스 홀든을 끌어 안았다.
  말캉하던 살에 점차 박히기 시작한 굳은 살을 엄지로 문지르자 발가락을 곱쳤다 펼치기를 반복한다. 소년의 발바닥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어 올라가며 잠든 그의 얼굴을 살폈다. 흔들 의자에 앉은 여인은 갈변된 백합을 입에 문 채 헐벗은 그들을 응시한다. 핏발이 선 두 눈에 읽히는 것은 다만 구분할 수 없는, 일종의 유리알에 가까웠다. 로라스는 소년의 머리 아래 자리한 베개를 바로하며 축축한 이불 속으로, 소년의 곁으로 더욱 파고 들었다. 악몽이 언제나 그를 푸르게 좀먹었다. 알베르토 로라스라는 인간은 녹슬어 갔고 낡아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에 익숙해져만 간다. 이젠 없는 아내와 함께 백골이 되어 간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사작대는 빳빳한 시트의 소리가 입속에서 바스라진다.
  다이무스 홀든은 제 등에 닿아오는 그의 가슴팍을 느끼며 눈을 뜬다. 그는 간간히 숨을 내뱉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깰까 팔을 둘러오지 못한 채 도드라진 척추에 코를 비비는 사내를 붙잡은 족쇠가 무엇인지 진즉 깨단하고 있었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필시 저와 같다고, 저 죽은 망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몸뚱어리라는 것을. 고개를 들어 마주한 여인의 시선에서 처연함이 떨어졌다. 달팽이들이 간 길에 점점이 남은 점액질처럼 투명하나 불쾌하기 짝이 없는 유의 것이었다.
  3년 간 그의 수업에 꼬박꼬박 출석해왔으나 다이무스 홀든이 그에게 가졌던 작은 관심이 무색하그로 그가 다이무스 홀든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년 가량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모든 것들이 우연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었는데, 그 날은 유독 그러했다. 알베르토 로라스는 저를 향한 소년의 시선을 알아차리지도, 소년을 향한 자신의 시선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시간을 보냈다. 그는 대부분의 삶을 요정과 함께 보내게 될 것이라 예견한 채 제법 많은 것들을 손에서 놓아버린 뒤였고 그것을 드러내기를 끔찍히 여기곤 했다.
  당신은 죽었어.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소년은 남자의 허벅지 새로 다리를 얽으며 시트를 쥐었다. 여전히 요동치는 뱃속에 가끔 숨을 거세게 뱉어내며. 당신은 죽었다. 죽은 이다. 그는 몇 번이고 그리 여인에게 말했다. 좋지 못한 꿈을 꿨다는 사내에게, 다이무스 홀든이 배풀 수 있는 호의란 고작 그런 것이었다.

 

 

 

1) 다이무스는 어릴 적부터 귀신을 보는 능력이 있다. 그러던 중 아카데미의 문학 선생 로라스를 만나게 되고 로라스의 곁을 맴도는 한 여성을, 귀신을 자꾸만 보게 된다. 기실 그녀는 로라스의 전처로 이미 죽은 몸. 로라스는 매일 같이 그런 그녀를 보며 일상 생활을 이어가고 점점 무뎌져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를 성불시키지 않는 것은 일종의 죄책감 때문(자신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생각). 그러던 중 꽁냥대다 제자 사이에 마음 없이 어쩌다보니 몸이 먼저 부딪히게 되는데 이때 로라스 내에서 도덕적인 붕괴가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로라스 자신은 계속해 되뇌이고 다이무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이어가고. 하지만 서로가 몰래 서로를 훑어보았으면 좋겠다. 필기를 하는 손, 수업을 하는 입술.


2) 로라스가 수업을 하면 여인은 교실의 뒤편 빈 의자 따위에 죽은 듯이 앉아 입에는 백합을 문 채 그를 노려보고 있으면 좋겠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로라스는 아무렇지 않은 듯 수업하지만(자신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다이무스는 그런 그녀를 보며 로라스에게 악귀 따위가 붙은 게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하면 좋겠다. 서로가 귀신이 보이는 것을 몰랐으면.

 

3) 섹스를 할 때 다이무스가 로라스의 아내를 직시했으면 좋겠다. 등을 껴안으며 또박또박 입 모양만으로 ‘당신은 죽었어요,’ 라고 말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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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무스. 문신.

  다이무스. 다이무스가 눈을 뜬 것은 냉회와도 같은 목소리를 듣고서였다. 아버지는 마부에게 돈을 쥐여주었고 마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 위 덜컹대는 마차는 야생 딸기 덤불의 뻗은 손을 짓이기고 빠르게도 달렸다. 잘 참았다. 그 한 마디에도 다이무스는 그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목소리는 상냥하지 못했다. 마치 정해진 대본을 읽는 것처럼 그는 손에 들린 작은 포켓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는 책을 읽지 않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어린 제 아들의 숨소리를 세며 글자를 시선만으로 두드리고 있는지도 몰랐고. 다이무스는 그러나 이내 입을 다물었고 머리카락을 어깨 한 쪽으로 넘기며 몸을 더욱 옹송그렸다. 등을 덮은 얇은 옷자락이 핏물에 축축했다. 호되게 얻어맞은 뒤의 손바닥에 입술을 대고 깊게 빨아들이면 이런 비린내가 나곤 했는데 그때와는 확실하게 많은 것들이 달랐다.
  퉁퉁하고 마차의 창틀과 벨져의 고개가 부딪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렸다. 다이무스는 저러다 그의 머리가 깨지지는 않을까 잠시 고민하다 이내 멍청한 짓임을 깨달았다. 그는 그리 두텁지 않은 담요를 접어 그의 머리밑에 끼워주었다. 무엇이 그리 불편한지 잠시간 몸부림을 치던 벨져 홀든은 이내 고개를 떨구며 다른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버지의 손이 커튼을 더욱 짙게 쳐내리고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가끔 마차가 크게 덜컹거려 몸이 뒤로 쏟아지던 때면 다이무스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벨져는 깨지 않았고 아버지도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저 마부만이 아주 조금 저택으로 향하는 속도를 줄여주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배아처럼 온몸을 웅크렸다. 모공 속에서 핏물이 화산처럼 터져나오는 상상을 했다. 입술을 열면 톡하고 봉숭아 씨방처럼 울음이 뛰쳐나와 전신을 내달릴 성 싶었다. 다이무스는 시뻘겋게 물이 든 입술을 다시 한 번 꺠물었다. 턱주가리가 파르르 경련했다. 원망할 이가 없었다. 너무도 당연하게 어린 다이무스 홀든은 꿰미에 매달려 있었고 울음을 삼켰다. 이후의 플롯은 여즉 아물지 못한 상처 위로 짐이 내려앉는 감각에 가까웠다. 그는 무게에 짓눌려 땅을 기게 될 것이다.
  "다이무스, 울어?"
  다이무스를 따라 들어가지 않았던 벨져는 눈을 둥그렇게 든 채 제 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원인도 시간도 그에 따른 결과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잔망스럽게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찢어진 살갗 속으로 침투한 땀방울에 척추가 쓰라리다. 손등으로 이마를 털어내며 고갤 저었다. 아니, 괜찮아. 한껏 뭉게진 기도를 쥐어짜 토해낸 목소리는 추하게 쉬어 있다. 주륵, 하고, 터진 입술에서 솟아오른 핏줄기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신선한 액체를 훔쳐내며 다이무스는 자꾸만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그는 자신이 괜찮지 않다고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흔화된 버릇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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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렉다무. 다리오.

  층계참을 울리다 벽면을 울리다 사무실 얇은 문짝 앞에서야 마침내 멈춘 그 소리에 다이무스는 중지 끝으로 얇은 은테 안경의 측면을 밀어올리며 아주 잠시(그래, 아주 잠시) 시선을 제 명패 위에 두었다 다시 서류철 새로 처박았다. 등 뒤의 채광창 위를 가린 보랏빛 커튼은 산호초를 닮은 빛깔로 발광하고 있었고 다이무스는 등 뒤로 떨어지는 그 빛무리가 느른하게 제 목덜미를 애무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잠시 심호흡했고 가끔씩 따그닥대는 소리를 내는 문짝을 의식적으로 무시하며 잉크를 머금은 펜을 들었다.
  "다이무스."
  짙은 분홍빛으로 물든 종잇장이 물꽃처럼 부풀어 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투욱하고 엉긴 검은 잉크 방울이 그러나 서류 위로 한 방을 떨어진다. 아. 반사적인 음성이 튀어나갔다. 다이무스? 문밖에서 이어지는 음성에 그제야 다이무스는 제가 티끌도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했다. 투욱. 다시 한 방울이 떨어진다. 멍청하게 고개를 든 그는 결국 안경을 벗어 짜부라진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한 번 문대고는 펜을 다시 책상 위 유기하듯 던져두었다. 들어간다? 그런 그를 알아차린 것처럼 사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짜 들어간다? 다이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바깥으로 열리게 되어 있는 문이 복도의 복실과 카펫과 마찰하며 서걱대는 소리를 낸다. 벽과 부딪힌 문고리가 거센 소리를 내며 튕겨 올랐다. 남자의 손이 문을 그러당겨 닫는다. 정신을 차릴 수 없다는 듯 남자는 두어 번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사실."
  남자가 성큼 공간으로 들어섰다. 다이무스는 그 만큼의 공기가 방을 빠져나간 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가 내뱉는 말들 사이사이에 들어간 숨표가 음율을 타는 것처럼 역동했다.
  "지금 조금 정신이 없다."
  나만 이래? 어느샌가 눈 앞으로 다가온 남자가 책상 위로 허릴 숙여 손을 뻗어온다. 드렉슬러? 시야 속에 그가 그득 찬다. 우스꽝스럽게도 아프지 않게 멱을 쥔 다리오 드렉슬러의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다이무스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점점 삼켜간다. 다리오라고 좀 불러봐. 이빨이 닿는다. 그 와중 열린 잉크병의 뚜껑을 닫기 위해 허적이던 다이무스의 팔이 허공에서 정지했다. 어서. 치열을 두드리던 혀가 다이무스의 입술을 핥아올렸다. 입술만을 맞댄 채 잠시간 미동을 않는다. 다이무스 홀든은 마침내 한숨처럼 그가 바라는 말을 내뱉었다.
  “다리오.”
  잘했어. 톡하고, 목을 죄던 셔츠의 단추 하나가 다리오 드렉슬러의 손에 풀려나갔다. 다이무스는 다리오 드렉슬러의 무릎이 책상 위 서류들을 짓이기는 것을 희미한 정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이내 혓바닥을 꾹꾹 눌러오는 그의 검지와 중지에 숨만을 삼켜댔을 따름이다. 아, 씨발, 한 달이었어. 숨표. 임무 때문에 밖으로 내돌린 나도 그렇지만. 두 번째 숨표. 한 달 동안 너는 회사로 찾아오지도 않았어. 다리오 드렉슬러가 응석을 부리듯 내뱉는다. 그의 송곳니가 목젖을 짓누르는 순간 다이무스 홀든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무력한 초식 동물 따위가 된 기분이었으나 불쾌하다고는 느낄 수 없었다. 다리오 드렉슬러의 손가락은 잘 손질된 고기처럼 조금은 짰고, 목울대로 넘어오는 침이 조금은 달았다.
  다이무스 홀든은 제 몸을 뉘인 의자의 등받이가 뒤로 넘어가며 삐걱이는 소리를 들었다. 둘은 마치 조리개를 채 가리지 못한 사진 한 장처럼 느릿하게, 빛을 받으며 함락된다. 어깨 너머로 뻗어나간 팔이 커튼을 소녀의 옷깃이라도 된 양 더욱 여민다. 도시는 연극의 막 속으로 사라지고…… 셔츠 속으로 파고든 다리오 드렉슬러의 손이 허여멀건 피부를 더듬어 나가고 있었다.
  아직도 하루가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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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다무. 나비. 영혼. 자살.

  강아지를 키웠다. 작고 하얀 강아지였다. 약간은 딱딱한 느낌이 드는 그 발바닥을 꼭 쥐고 있으면 그 녀석은 잠시간 바둥대다 바레타에게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인지 금세 느른한 고양이처럼 고롱대며 무릎 위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한 나날들은 몇 년이고 지속되었고 때문에 바레타는 그 강아지가 죽을 수 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자주 잊고 있었다. 마치 저 자신에게 중요치 않은 것들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듯 불가항력적으로. 그는 아무래도, 데샹의 천진한 미소를 보며 이래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차가운 메스가 눈을 감은 생명체의 배를 가르고 장기들을 꺼냈다. 그 작은 몸뚱어리 어디에 꾸역꾸역 들어갈 곳이 있었는지 뽑아내도 뽑아내도 대장은 자꾸만 흘러나왔다. 다시 주워담을 수 없는 말이나 물처럼 자꾸만. 바레타가 울먹였다. 까미유, 꼭 이래야 하나? 혐오감이 미미하게 깃든 목소리에 데샹이 물었다. 그래서, 내가 싫어졌어? ―아니…… 고개를 내젓자 데샹이 메스를 차가운 알코올이 그득 담긴 대야 속으로 던져 넣었다. 한 방울이 튀며 뺨이 금세 시려왔다.

  다음 날, 바레타는 무릎을 적시는 축축한 감각에 잠에서 깨어났다. 추한 몰골로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묻혀 있던 그 강아지는 여전히 바레타의 무릎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게감도 낯익은 감각도 없었으나 바레타는 막연히 그것이 그 강아지였음을 알아차렸다. 제 수명에 비한다면 그래도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녀석이 죽는 순간까지 이름조차 얻지 못한 채 땅속에 묻혔던 탓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바레타는 덜 덮인 흙을 쌓아올리며 강아지의 땅 위로 비죽 튀어나온 귀를 검지로 찔러보았다. 컹, 하고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바레타는 그날 아침 제 무릎을 짓눌렀던 그것이 녀석의 영혼이었음을 알아차렸다. 강아지는 한참을 제 시체 주위에서 코를 킁킁댔다. 맡아질 리 없을텐데 지독하게 불쌍한 얼굴로.

  굳이 전환점이라면 그 날이었을 터다. 많은 것이 달라졌다. 바레타는 데샹 곁의 반딧불을 향해 손짓했다.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데샹이 말했다: 뭐해, 거긴 아무 것도 없어.

  데샹의 곁을 맴도는 검은 반딧불과 자신을 거둔 신경질적인 여자의 어깨를 자꾸만 갉아먹는 부사 빛깔의 쥐, 회색 정장을 빼입고 고상한 체 거리를 오가는 사내들의 시계 같은 영혼들이 자꾸만 바레타를 짓눌렀다. 멍청하게 길가에 앉아 사람들을 바라보는 날들은 점차 늘어만 갔고 손 안에 떨어지는 지갑들의 수도 점차 줄어만 갔다. 그러던 와중, 그는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공허히 비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눈도 코도 입도 마치 우주 어딘가의 블랙홀에 잠식된 양 온데간데없이 어그러져 인지를 방해했다. 바레타는 자신이 멍청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씨발스러웠다. 여자의 히스테리도 그에 비례해 늘어났다. 데샹이 위로하듯 제 손을 쥐었고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녹빛이 짓물린 제 거미의 주둥이에 뜯겨나가는 환상을 보고서 바레타는 조심스럽게 그의 두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데샹의 불안을 속달하듯 검은 반딧불들은 웅웅대며 바레타의 거미들을 공격했다. 그 날 이후 데샹은 바레타에게 많은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마치 본능적으로 제게 이로운 것을 찾아가는 곤충들의 몸짓에 바레타는 희미한 전율을 느꼈다.

  히카르도 바레타의 열일곱번째 겨울은, 그러니까, 그러한 형태였다. 바레타는 이제 이 모든 일련의 변화들에 대한 적응기에 들어서 있었다. 마치 연옥처럼 짐승들이 넘쳐나는 뒷골목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그는 차라리 잠시 시선을 돌리기를 택했다. 그는 바쁘게 제 몸뚱어리를 종종걸음으로 좇아가는 느릿한 영혼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환상체들과 실재하는 인간들의 상관 관계는 도모지 명확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알게 된 단편적인 것들이라고는 그 환상들이 사라지면 인간은 뿌리를 잃은 장미꽃처럼 머잖아 시들어버린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런 흔해빠진 죽음을 머금은 거리에도 비는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레타는.


보았다.


  나비는 마치 꽃가루를 털어내듯 빗속에서 빛가루를 뿌리며 수척하게 퍼덕였다. 빗줄기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진 인파가 유기한 이 작은 생물체를 어찌할 길 없이 바라보았다. 희붐한 빛을 뿜어내는 나비는 바레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바레타는 실재하는 것들을 인지하는 영혼을, 이러한 유의 환상을 맨 처음 그에게 기묘한 형태의 악몽을 실현시켰던 강아지 이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때문에 히카르도 바레타는 한참을 망설였고, 옷 속에 감춰진 허벅지를 타고 빗줄기가 흘러 내렸을 때 즈음에야 허공에 손을 뻗어낼 수 있었다.

  어룽진 나비가 바레타의 손 끝에 앉아 날개를 접었다. 무거운 빗물을 견뎌낼 수 없다는 듯 더듬이를 파르르 떨어대며. 한 손을 들어 비를 가리자 제자리서 날개를 퍼덕인다. 바레타는 한 손을 들어 자신의 손등 위 작은 지붕을 만들었다. 나비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주인을 찾아가지 않는 건가. 약간의 불안감이 엄습했으나 스스로가 떠나가지 않는다면 어찌할 길이 없는 것이다. 잠시간 도깨비처럼 내린 비가 점차적으로 그쳐가는 것을 확인한 바레타는 손등을 세차게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비가 발작하듯 푸드덕대며 바레타의 곁을 맴돌았다. ……돌아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가 없을텐데, 빛으로 이루어진 그것을 향해 내뱉는 제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나비의 날갯짓은 더욱 비대해져만 간다. 빛가루가 아직 먹구름이 그득한 하늘 아래 흩뿌려졌다. 스스로가 발하는 빛에 가려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바레타는 그제야 인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작아지는 거다. 혹은 저 날갯짓으로 흩뿌리는 빛가루가, 어쩌면 저 나비의 본체를 갉아 내는 빛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이름도, 아니, 얼굴도 성별도 알지 못하는 이에 대한 동정심이 치솟았다. 바레타는 영혼을 잃은 이들의 종말을 알고 있었다. 타살에 대비하는 영혼은 육체를 떠나가고 자살에 각오한 영혼은 점점 제 속으로 파고든다. 특별할 것 없는 죽음일 터였으나 한 가지 지금까지와 다른 점이 있었다면 도움을 바라는 직접적인 손길이었다.

  충동적인 물음을 바레타는 내뱉는다. 도움이 필요한가? 나비가 크게 퍼덕였다. 그리고 바람결을 타고서 제 원하는 곳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바레타는 그것을 따라 달렸다. 신발 속에 들어찬 물에 걸음을 옮길 적이면 철벅이는 소리가 유난하게 울린다.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이 땀과 엉겨 엉망이 되었다.

  나비가 당도한 곳은 적당히 구색을 갖춰 지어진, 써느러운 저택이었다. 철창 같은 대문이 삐걱이며 바람에 따라 흔들리기를 반복했는데, 바레타는 들어서기를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내듯 한 걸음을 내딛어 정원으로 들어섰다. 적당히 사람이 사는 구색만을 갖춰둔 냄새가 짙은 곳이었다. 고사한 정원이 싯누랬고 비와 더불어 꼭 짚단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돌길을, 그 새를 메운 잡초들을 짓이겼다. 저택으로 그리고 바레타는 낮은 곳에서 위로 들이밀어진 날카로운 검날에 멈칫했다. 써느러운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바레타는 은빛 머리카락을 짧게 쳐올린 소년의 붉게 달아오른 눈가를 보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양 겁에 질려 간헐적으로 떨려오고 있는 입술은 그러나 소년의 것처럼 전연 느껴지지 않았다. 소년의 주변을 감싼 나비의 무리는 대개 온전치 못했다. 바레타는 그 이질감 속에서 눈을 내렸다. 소년에게서도 희붐한 빛이 비져 나왔기에 망설임없이 그가 내민 검의 날을 쥐었다.

  "……!"

  날카로운 통증이 손바닥에서부터 팔꿈치를 타고 흘렀다. 소년은 그러나 영혼의 일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제야 그가 나비의 주인이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 나비가 바란 것이 무엇이었는가도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바레타는 가로로 자상이 길게 새겨진 손바닥을 안쪽으로 말아쥐었다.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년은 열일곱 난 바레타보다 머리 하나는 너머 작은 키였다. 기껏해야 열네다섯 즈음 되었을 법한 그는 팔을 한 번 신경질적으로 휘둘러 제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거머쥐었다. 파스스 빛가루가 그 주먹 속에서 떨어져나왔다. 그 광경에 바레타는 백치처럼 입술을 뻐끔댔다. 무슨, 아니, 도대체 왜?

  "무슨 짓이냐."

  화급히 소년의 손바닥을 펼쳤다. 보이는 것은 고사하고, 제 영혼을 죽인다고? 부절이 떨어져나간 그 생명체가 소년의 손아귀에서 발작했다. 우윳빛 액체가 질금 새어나오는 몸뚱어리는 이내 허물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찢겨나간 날개와 잘려나간 더듬이를 움찍대면서도 나비들은 그의 곁을 떠나가지 못했다.




  아…… 누가 저 대신 좀 써주실래여…… 사탕…… 사탕 드릴게요……


1) 그러니까 바레타는 사람의 영혼을 조금 특이한 형태로 보는 과인데 하얀 나비가 발작하듯 저를 찾아와서 다급함을 느끼고 나비를 따라간다. 나비가 당도한 곳은 어린 다이무스와 상처 입은 나비들이 그득한 저택. 바레타는 소년이 폐허가 된 저택에서 자꾸만 제 영혼들(빛나비)을 죽이는 것을 보는데 이내 그를 저지하게 된다. (←지금 여기!) 하지만 바레타가 떠나가면 소년은 다시 나비를 죽이기 시작한다. 


2) 바레타는 이후 자주 소년의 저택을 찾아가게 되는데 어느날 돌아간 저택은 그가 보았던 폐가가 아니게 되고 되려 사람이 살고 있다 주장하듯 생기 넘치게 변한다. 하지만 여전히 저택에는 소년 혼자만이. 소년은 강한 척 하지만 의외로 겁이 많다. 마음의 벽이 허물어질수록 어리광을 부리고 떼를 쓰고(마치 한 번도 그렇게 굴어보지 못한 양) 바레타를 곤란하게 하는 일도 잦다. 하지만 바레타는 그것도 좋음. 점점 소년이 좋아지고 있다.


3) 바레타는 소년에게 묻는다. 부모님은?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어색하다고 생각하는데 소년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흰 양말을 그러올리며 여상스럽게 대답한다. 기다리고 있는 거다. 뭘? 다들 돌아오기를. 바레타는 기분이 이상해진다. 꼭 다들 소년을 버리고 떠난 것처럼 들려서. 바레타는 입을 다물고 소년은 주름진 셔츠를 펼쳐내며 바레타에게 묻는다. 자고 가. 명령조인데 애원처럼 들린다. 바레타는 저녁에 데샹과의 약속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작게 고개를 내저으려 하지만 소년은 바레타를 보고 있지 않다. 결국 바레타는 몇 번 입술을 뻐끔대다 거절의 말이 어렵다는 것을 깨닫곤 대답한다. 어디서 자면 되나?


4) 바레타와 소년은 이전의 몇 달, 혹은 몇 주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그날 나누게 된다. 바레타는 소년에게 형제가 둘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소년은 바레타가 뒷골목의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지만 바레타에게 설교 섞인 말들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소년은 바레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히카르도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바레타. 그는 그렇게 불렀다. 바레타. 바레타는 소년의 이름을 물었다. 다이무스. 성은?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바레타는 소년을 이름으로 부른다. 다이무스. 다이무스는 무릎을 세운 채 페치카 앞에서 고갤 묻었다. 울지 않는다. 불구하고 서럽다. 저택이 소년과 함께 울고 있다. 바레타는 등 뒤로 내려앉는 물기가 무겁다.


5) 되게 클리셰적이지만 바레타가 새벽에 깨 소년의 방으로 찾아갔으면 좋겠다. 하지만 소년은 보이지 않는다. 저택은 컴컴하고 기이하게도 발밑에는 웅덩이가 질척댄다. 바레타는 저택의 방 문들을 하나하나 다 열어보기 시작하는데 결례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지만 일단 소름이 돋아 소년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 있다. 그러던 중 고저택에 흔히 있을법한 쪽문을 찾아내면 좋겠다. 그는 계단을 내려간다.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축축한 공기와 퀴퀴한 냄새가 진동한다. 하지만 통로를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정갈한 방 하나가 나온다. 그곳에는 어린 아이들의 흔적이 그득하나 장난감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가검과 코트, 절그럭대는 소리를 내는 작은 갑옷 따위의 것들. 바레타는 그곳에서 제 무릎 께까지 오는 나무 상자에 몸을 기댄 채 잠든 인영을 본다. 소년? 아니다. 훨씬 크다. 장성한 사내다. 바레타가 걸음을 옮기자 먼지가 풀썩 일어난다. 쪽창으로 들이치는 달빛에 보이는 머리카락은 은발이다. 닮았다. 바레타는 사내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감긴 눈꺼풀이 금방이라도 떠질 것만 같았는데─아니었다. 바레타는 무척이나 느릿하게 뒷걸음질 쳤다. 상자의 뚜껑에 한쪽 뺨을 댄 채 잠들듯 죽어 있는 사내.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술과 희게 질린 피부와. 소년과 꼭 닮은. 바레타는 제가 걸어온 길을 도망치듯 뛰어올랐다. 바레타는 저택을 뛰쳐나온다. 여우비가 내린다. 뒤를 돌아본다. 저택은 여전히. 폐허다.


6) 바레타가 본 영혼들은 이제껏 작은 규모의 것들밖에 없었으면 좋겠다. 모종의 이유로 멸문한 홀든가에서 다이무스는 유령처럼 떠도는 존재였으면 좋겠다. 벨저와 이글은 죽었다. 육체는 어릴 적의 추억을 그득 담아둔 방 속에 갇혀 고사했고 다이무스의 영혼이 저택 그 자체다. 바레타가 마주한 소년은 다이무스이되 다이무스일 수 없는 그의 절제된 무의식. 단 것들을 마음껏 집어먹고 마음대로 타인에게 응석을 부리고 수업도 듣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자유라고 느끼는 어린 아이다. 제 몸이 죽은 것도 알지 못한 채 제 아우와 가족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만약 실제의 다이무스라면 기다리는 짓은 않고 스스로라도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터였으나 가장 밑바닥의 어린 다이무스는 가장 연약하고 가장 멍청하고 가장 수동적이다. 어린 다이무스가 바레타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이무스의 영혼으로 재건된 저택은 명멸하듯 예전의 빛을 되찾았다 꺼뜨리기를 반복한다. 다이무스는 자신이 더는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없음을 알고 있고 때문에 어린 다이무스가 자꾸만 영혼의 편린인 나비(프쉬케)를 죽이면 좋겠다. 일종의 자살인 셈. 바레타에게 머물러 달라 부탁했던 것도 마지막을 지켜줄 사람을 바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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