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무다무. 앙크르.

  서걱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네 일상인가.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으나 납득하기는 힘든 구석이 있었다. 나는 너의 태도와 전장의 너만을 고대했다. 너로서의 내가 지닌 마지막 기억들은 대체로 날붙이나 감흥없는 흑백 화면에 불과했기에 전사되어 그대로 이어붙인 필름 같은 이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제서야 너와 나 사이엔 일상적인 대홧거리가 퍽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네가 나의 대답들을 알고 있는가는 모르겠으나 나는 확실히 너의 대답들을 알고 있다. 너는 오전 6시에 일어났고 오전 7시에 출근했으며 17분 즈음 지나치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가장 값싼, 얇은 햄쪼가리가 든 역겨운 빵을 역겹다 생각하면서도 배를 채우기 위해 꾸역꾸역 입에 처넣었다. 그리고 은행으로 가 대출 상담 따위를 돕고 점심을 굶은 뒤 늦은 저녁 귀가해 끼니를 대신할 커피를 내리고선 만들어서라도 가져온 서류철을 책상 위에 펼쳐 펜을 든다. 꼴사나운 염탐조차 없이 내 기억 속의 네 생활이었다. 너는 변화를 싫어하는 녀석이니 아마 지금도 그렇겠지. 다만 무엇인가 많이 달랐다. 안타리우스를 나온 뒤, 너는 어떻게 지냈지? 몇 번 입속에서 굴리던 그 질문을 시치름하니 감춘 채 묻는다.

  "벨저 홀든과 이글 홀든은 어떻게 됐지?"

  시린 분위기를 일세하듯 턱 아래 낀 깍지를 굳은 어깨와 함께 풀어내며 내뱉었다. 내리깐 시선 속 검은 정장 위 드문드문 네 하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으나 굳이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나는 네게서 재미를 보지도, 그렇다고 제법 눈물겨운 반쪽의 재회를 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대가리를 깨뜨리며 신이 나게 싸우지도 않았는데 네 흔적이 내게 남아 있다니. 내가 이 곳을 걸어 나가 네 모든 기억을 지우고 안타리우스로 돌아간다 한들 현재가 없어지지 않는다니. 너는 잠깐 싱둥겅둥 당근을 자르던 손을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뒤돈다. 경멸에 찬 바그라진 시선이 내 미간에 즉각적으로 떨어진다. 그 어설픈 증오에 숨이 가빠왔다. 너는 네가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게 있어 불가해한 영역이다. 너의 미움은. 신기하지.

  "네가 부를 이름들이 아니다."

  "너도 알잖아? 녀석들은 제법 걱정할 가치가 있는 녀석이야."

  "너와 그들은 아무 관계도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너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네가 쥐고 있는 칼을 휘두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하는가를 고민한다. 아, 그래? 내가 내 동생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해주지? 빈정대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꺼내지는 않는다. 네가 남았군. 부지중 입밖으로 중얼대자 너는 정말 검을 빼 들 표정이다.

  너는 홀로 지내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있었음에도. 몸을 일으켜 네 뒤로 다가가 목덜미마저 결벽한 허연 셔츠 깃에 손을 뻗어 접힌 부분을 펼쳐내자 너는 오한이 이는 듯 한 번 어깨를 희미하게 떨었다. 불쾌하다는 뜻이다. 이런 곳에서 고상하게 말 한 마디 없이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다. 허. 기가 차 한 번 조소하곤 다시 늘어지듯 소파에 뉘인 몸을 한 번 옆으로 굴려 시선을 협탁 위로 향했다. 재미없긴. 손을 뻗어 엎어진 액자의 조임새를 더듬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액자였으나, 이 아래 무엇이 있는지는 안다. 너의 어린 시절이다.

  나는 그저 네 날갯죽지 아래서 스쳐가는 과도기가 행복했다. 배양기 속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목검을 쥔 채 휘두르던 어린 너였고 아우들에게 단내나는 과일을 밀어 양보하던 너였고 회초리 자욱이 선연한 허벅지에 분한 듯 입술을 깨문 채 숨 죽여 이불 밑에 은닉하던 너였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엔 네가 없었다. 나는 네가 본 풍경들을 답습하며 타의에 성장했다. 나는 네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해하지 못했고 너는 그것이 어찌 되었든 그런 나를 증오한다 표출한다. 내가 너의 기억을 훔쳤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몰랐다(모체들은 그런 부분에 있어 생리중인 계집년들처럼 민감하기 짝이 없었다). 혹은……

  눈가를 데우는 뭉근한 열기가 여전하다. 기분은 제법 유쾌하지 못하다. 나를 알지 못하는 너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로서 대강 6만 시간이 넘어가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기대했던 것보다는 제법 잘 참았네. 눈을 굴리며 네 뒤통수를 말끄러미 노려보다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장하군.

  "이봐, 자아에 적대적인 성실한 노동자 씨, 오늘은 좀 기분을 푸는 게 어때?"

  결국 액자를 들추지 못한 채 요리를 하는 네 뒤통수를 향해 내뱉는다. 네가 나를 한 번 더 돌아본다. 여전히 대답은 없다. 네 표정은 금방이라도 까슬한 머리카락을 잡아채 좆을 물리고 싶을만치 선정적이지만 분노를 성욕으로 돌려 돋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식욕에 관련된 문제기도 하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문 밖에 서 이틀을 굶어야 했다. 그 즈음이면 내가 '네' 잘난 동생들 중 하나인 이글 홀든 정도라도 알기 마련이다: 너는 나를 알고 있고, 나를 명백하게 피하고 있었다.

  그럴 거면 아예 이 땅을 떠났어야지. 아름다운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숨 죽인 구렁이들을 베어내고 살갗을 지져 재생 불가하게 만들었어야지. 맛적은 흥얼거림이 절로 튀어나온다.

  "네가 널 만나 기분이 엿같은 건 알겠지만 오늘은 널 강간하러 온 게……"

  "……그만!"

  그리고 네 외침. 그럴 이유가 없었음에도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너는 네 이마를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짧은 머리카락이 굵직한 손가락 새로 우시시 억세게 비져 나온다. 제발 그 입을 다물어라. 부탁이다. 그 말이 주는 어폐에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부탁? 네가? 별 일이군. 여상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그 절박함에 푸슬푸슬 마른 웃음이 튀어나왔다. 만성적인 두통이 다시 밀려오는 듯 두어 번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너는 눈을 뜬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마치 너 자신에게 필요한 문장처럼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다:

  "너는, 내가 아니다."

  그래, 나는 네가 아니지. 당연한 얘길 당연하지 않게 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어디 또 있을까.

  "너와 같은 유전자에 네 첫 몽정이 둘째 동생에게 강간당한 다음 날이었다는 것과 네 유서가 든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지만 나는 네가 아니지, 다이무스 홀든."

 네 살갗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리고서야 너는 내가 네 앞으로 다가온 것을 알아차린 듯 싶었다. 그리고 너를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내가 아니지. 손을 뻗어 네 양 뺨을 쥔다. 광대 위 십자로 난 흉터의 질감은 여타 피부와 다르게 오돌토돌했고 약간은 민들했다. 목덜미를 타고 각진 어깨를 지나 네 팔꿈치를 더듬던 손이 마침내 네 손을 감쌌다. 억지로 쥐어잡은 그 손을 들어 쥐인 음식물 찌꺼기가 묻은 민날을 왼뺨에 가져다 깊게 짓누른다. 금세 시큰한 감각이 밀려왔다. 고기를 써는 감각이다. 우스운 것은, 내 손바닥 속 너의 손가락이 여즉 이 껄쩍한 식칼을 놓지 않은 채 목숨줄처럼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는 내가 바끄럽나? 네 모든 추악함을 모다 격리시킨 내 몸뚱어리가 저주스러워?"

  손등으로 뺨을 훑어 계속해 흘러내리는 핏물을 훔쳐냈음에도 제법 깊은 곳을 건드린 모양인지 지혈이 되지 않았다. 제대로 그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너와 같은 십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네가 나를 분필로 그어둔 문짝 만큼은 기억을 해주겠지. 날을 쥐어 네 손에서부터 식칼을 앗았다. 바지 안으로 단정히 넣어 입은 네 셔츠를 밖으로 끄집어 내 피가 묻은 날을 닦아냈다. 시뻘겋게 젖어든다.

  "무슨 짓……!"

  "이번엔 네가 닥쳐, 다이무스 홀든."

  부탁이니까. 그러자 너는 입을 다문다. 허리를 숙여 네 배에 고개를 묻은 뒤 붉게 젖은 셔츠에 얼굴을 닦아냈다.




앙크르ANCRE. 이것저것 더 적고 싶었는데 글이 안 적혀서 다 잘라냈더니 기분이 묘하다! (ㅠ-ㅠ ) 7월 다 가기 전에 그래도 하나라도 적으려고 했는데 결국 8월이 되어버렸다. 사이퍼즈 한도가 풀렸으니 이제 그랑블루나 애들 입혀줘야겠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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