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렉다무. 너의 꿈. 창문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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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린 날이다. 굽굽하게 시린 공기가 창밖을 돌고 비가 올 바람이 분다. 마치 물 속에서 숨을 들이쉬는 것처럼 고로록대며 공깃방울이 목구멍으로 금방이라도 빠져나올 것만 같다. 유난하게 무거운 정장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바로 걸며 동시에 목을 된 넥타이를 끌러 내린다. 쪼크라든 방향제가 역할만치 지겨운 라벤더 향을 토해낸다. 좁쌀만한 벌레들이 죽어 있는 반고체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주니가 일어 억눌린 숨을 내뱉는다. 그러니까, 달갑지 못한 겨울의 초입이다. 작년 겨울 즈음 옷장에 처박아둔 좀약이 여즉 효과를 보고 있을런지는 알 수 없다. 두터운 옷가지들을 하나둘 꺼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상자들을 풀어내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썩 유쾌한 일은 아니 된다. 손목을 단추를 풀어내고 셔츠를 벗고서야 깃에 묻은 잉크 자욱을 알아차린 홀든은 혀를 차며 옷걸이로 향하던 손을 거둔다. 클리닝을 맡겨야할 성 싶다.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 한 캔을 따며 버티컬을 걷어낸다. 부연 김이 부자연스럽게 서린 창문이 드러난다. 다이무스 홀든은 잠시간 고민하다, 그 위로 한 문장을 새끼손가락을 들어 적어내린다.


거기 있나Bist du das?


  그는 창문을 응시한다. 그토록 조심스레 숨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매번 이 짓을 반복할 적이면 그는 제가 기어이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잦게 고민한다. 그로선 일상에 납득될 수 없는 비상식 탓이다. 다이무스 홀든은 걷었던 버티컬을 반즈음 다시금 내린다. 그의 글씨는 금세 희미한 자욱을 남긴 채 희붐한 창에 스며 사라진다. 많은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되는 버릇이다. 냉장고의 맥주 캔을 꺼내 따며 다시 한 번 일별하나 달라진 것은 없다. 옷소매에 팔을 꿴다. 간밤의 꿈이었나. 그는 세뇌하듯 중얼거린다. 꿈Traum. 퍽 멀게만 느껴지는. 다이무스 홀든은 꿈을 꾸지 않는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한 그는 그러하다. 그는 조금 더 그 단어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침대의 프레임에 등을 기대 랩탑을 연다. 숫자들과 익숙한듯 낯선 이름들이 즐비한 화면이 희게 그의 얼굴을 비춘다.

  이런 일들은 대체적으로 시간을 죽이기에 적합하다. 공백이 껄쩍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다이무스 홀든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퍼센티지의 기입을 끝마친 뒤에도 타자 소리는 고막을 두드리는 듯 하다. 그는 고개를 젖혀 매트리스 위 정수리를 지그시 누른다. 그리고 침대의 오른편 자리한, 반쯤 올라간 버티컬의 루버 새로 시선을 향한다. 뒤집어진 시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눈에 띄는 것이 있,

  다이무스 홀든은 몸을 일으킨다.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카페트 위로 엎어져 떨어진 랩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의 짚은 손등을 찍는다. 고통을 감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버티컬을 걷는다. 그는 뒤집혀진 글자를 본다. 꿈. 이건 꿈속인가. 그는 당황한다. 그는 먼지 하나 끼지 않은 창틀에 손을 얹는다.


독일어German?


  뒤집힌 문장이 얘기한다. 아니지, 이 말은 어폐가 있다. '누군가'가 뒤집힌 문장을 적는다. 다이무스 홀든은 자신이 여전히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창틀이 아닌 유리 위 손을 짚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몸을 지탱한 손바닥을 떼어낸다. 지문 자욱 골 새로 우울한 습기가 차오른다.


너 거기에 있구나You ARE there. 너는You are,


  손날으로 쓸어 흔적을 지워낸다. 다이무스 홀든은 그 문장을 읽지 못한다. 다급하게 휘갈긴 글자는 불구하고 무척이나 오랜 세월을 넘어온 듯 한 줌마다 잔등같은 불안이 그득하다. 그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자꾸만 시선 속으로 파고드는 투명한 글자들을 아낌없이 머릿속에 눌러 담는다. 그러다 문득 축축한 감각에 아래를 응시하자 점차적으로 웅덩이를 넓혀가는 액체가 있다. 다이무스 홀든은 화급히 옆으로 기울어진 맥주 캔을 바로한다. 시큰한 알코올의 향이 시트 위로 스며든다. 그는 심호흡을 하는 듯 마는 듯 어정쩡한 한 숨을 들이킨 뒤 부엌으로 걸음을 옮겨 희게 빨린 행주를 집는다. 맥주에 입을 댄다. 김이 빠진.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온다. 창문은 마치 저 자신이 생명을 지닌 양 많은 것들을 토해냈다 주워담기를 반복한다. 멀뚱히 손에 축축한 천을 든 채 응시하자 다시 한 번 더, 글자가 사라진다. 유리에는 손자욱이 그득하다. 마치 어린 시절 마주했던 칠판처럼. 서툰 지우개질. 다시. 더는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아마도, 누군가는 창에 김이 차오르기를 기다린다. 20여 초가 남짓한 시간이다.

  길다.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 20초가 수어 번 흐르고서야 다이무스 홀든은 건너의 누군가가 헤매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다이무스 홀든의 검지 손가락은 두어 번 유리 위를 배회하나 선 하나 긋지 못한다. 그는 결국 손을 내린다. 무엇인가를 회피하듯 젖은 이불을 말아 카펫 위에 떨군다. 여즉 엎어져 있는 랩탑을 바로 해 닫고 충전기를 꽂아 넣는다. 끔벅이며 점멸하는 붉은 등은 할로겐 전구의 누런 빛을 받아 더욱 유난하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들자 누군가의 말이 그를 반긴다.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깜박인다.


  갓 전쟁이 끝났어The war just ended.


  전쟁─아프간인가. 자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에 대해, 또한 그는 자신이 이 비상식에 점차적으로 복속되기 시작한다는 생각을 한다. 다이무스 홀든은 어떤 말을 적어야하는가 고민한다. 그 짧은 간극, 건너편의 누군가는 문장을 다시 씹어 삼킨다. 투명한 유리만이 남는다. 이곳은…… 비가 내리는 모양이다. 투둑대는 소리. 유리창 너머로 아스팔트 길이 보인다. 신호등이 푸른 색으로 바뀌고 행인들은 횡단보도를 건넌다. 아침 출근길 그는 제법 큰 사고가 있었던 것을 떠올린다. 검은 타이어의 마찰 자국이 인위적인 전선처럼 늘어진다. 김이 서린다. 현실이 사라진다.


너는 사라졌어You are gone.

내가Am I?

응, 네가Yes, you are.


  색채 없는, 투박하고 굵은 그 필기체를 응시하다 창에 손가락을 가져다댄다. 빗방울이 떨어져 다시 글자들을 지운다. 긴 팔을 껴입은 행인들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감는다. 빗소리가 들린다. 무겁고 가깝다. 다이무스 홀든은 자신이 적은 멍청한 문장을 지운다. 김이 서리는 속도는 조금 더 느릿하다. 그는 유리창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둥글게 오므려 더운 입김을 분다.


나는 여기 있다I AM here.

하지만 여긴 아니지But NOT here.


  지독한 두통이 인다. 창문을 짚은 손이 천천히 미끄러져 시린 창틀 위로 떨어진다. 다이무스는 문득 울먹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유리 위 이마를 댄다. 금세 이마는 축축해진다. 다이무스 홀든은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마치 강제적으로 전개된 우주의 한가운데서 밭은 숨을 뱉어내는 기분이 된다. 그의 손가락에는 무게가 없다. 이마에서 뺨으로, 뺨에서 입술로 그는 미끄러진다. 심장은 비산할 듯, 흉곽을 흉포히 찢어발길 듯 박동을 빨리하고 핏줄이 돋은 손등은 한 겹 남은 시트를 움켜쥔다.

  다이무스 홀든은 발작적으로 버티컬을 끄집어 내린다. 세상이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 것은 창문이다. 창문은 결코 세상으로 확장될 수 없는 개념임에도 그는 그것을 망각한다.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감는다. 침대에 걸터 앉은 채 호흡을 고르다 발치에 치이는 이불 위로 발을 뻗어 짓이긴다. 고개를 젖혀 입술을 벌린 채 몇 번이고 날숨을 뱉는다. 뒤로 뻗은 팔이 자신이 목을 조를 것만 같은, 그런 있을 리 만무한 상상을 한다.

  이변이다.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한다. 떨려오는 폐부를 만질 수 없음에도 배를 누른 채 천장을 올려다 본다.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을 슬퍼해야하는가.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오랫동안 앓을 기미다. 그는 타인의 글자를 보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으레 그러하듯, 고질적이고 본질적인 충동처럼 그는 루버의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그 틈을 벌려낸다.


Me haces falta.


  아.

  사라지지 못한 문장과 함께 그의 입술 새로 장탄식이 역류하는 꽃처럼 흐른다. 그 울음도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내 물방울이 되어 사라진다. 빗방울은 창밖으로 흐른다. 한 방울 두 방울. 비는 이렇게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린다. 창문 너머, 행인들은 우산을 쥐고 있지 않다. 비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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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오 드렉슬러는 커튼을 닫는다. 더는 대답이 없다. 드렉슬러, 입관할 시간이야. 조노비치의 음성은 침잠되어 하수구 속 검은 물처럼 진득하게 그의 입속에 고인다. 그의 꿈도 죽어 있다.




  뒷내용 더 있는데 못 적겠다…… 우리 어머니는 왜 내게 빨간펜을 시키지 않으셨는가…… 씽크빅이나 함 시작해볼까…… 언젠가 적겠지.


1) 다이무스 홀든은 다리오 드렉슬러의 꿈이었다. 비가 아니야, 홀든, 그건 비가 아니야.


2) You are gone을 '네가 사라졌어,'라고 적으려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이무스는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드렉슬러가 '너는 사라졌어,'라고 마치 누군가를 가르치듯, 그게 남아 있는 진실이라는 듯 적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조금은 어색하지만 저렇게 적어버렸다. 다이무스가 어느날 창문 밖에 뒤집혀 적인 문장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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