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글.

  다이무스 홀든은 그렇게 한참을 누워 천장에 새겨진 기하학적으로 이어진 꽃줄기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이따금 부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두세 개로 분열되는 꽃봉오리에 몇 번이고 손등으로 눈을 눌러 비비며. 방 안의 공기는 어느샌가 적당한 온도로 데워져 더는 춥지 않게 되었으나 옴폭 패인 등허리 아래엔 축축한 식은땀이 고였다. 사타구니 께에 닿는 시트는 축축했고 금방이라도 손을 벨 수 있는 종이처럼 풀을 먹어 빳빳하게 접혔다. 우린 좋아하니까 섹스하는 거잖아. 녀석은 그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좋아한다는 말의 정의를 알지 못한다는 현실만은 명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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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 구원.

  밤의 문을 열었고 해 질 녘의 문을 닫았다. 그 무수한 새벽의 틈바구니서 나의 꿈은 도시 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철겹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묻지 않았음에도 쌓일 눈이네요, 하고 말한 한나는 창을 닫았다. 금세 김이 서리기 시작한 유리 위로 하얗게 육각 결정이 이음새를 맺었다. 늦은 겨울보다는 이른 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손등을 갖다 문댄 유리가 축축했고 얼음처럼 시렸다. 등을 진 벽난로에서는 나무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기 속에서 피곤이 손가락 끝 파슬파슬 공기 중으로 흩어지듯 간헐적으로 몰려왔다. 지독히 인위적이어서 불쾌하기 짝이 없는 감각에 발가락이 얼어붙어 썩어가기 시작한 것인지 아른아른 저렸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주 작게 뒤척였다. 가끔 푹 꺼진 바짓단이 펄럭였으나 여전히 고통은 없었다. 의식적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붉은 불길과 희게 질린 창틀에 붙박았다. 너의 얼굴이 보였다. 그 너머서 여전히 식어빠진 얼음알갱이들이 그림을 그리기 위한 종이처럼 쌓여가고 있었다. 


  날 고치려 들지 마. 아직 부서지지 않았으니까.


  다이무스 홀든이 죽었다. 흉포하게 흉곽을 뜯겨 꿰뚫린 심장은 확실히 멎었으니 그는 변명의 여지조차 없이 살해당했다. 하지만 나는 내 시체가 썩는 냄새를 맡지 못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가끔 잊어가며 고민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째서 고민할 수 있나를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내게 목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너의 억지스러운 입맞춤을 받고 이틀이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두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둠 속이었고 눈을 더듬기 위해 자유로운 손을 들었다. 손에 닿아오는 것 또한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눈꺼풀을 훑지 못한 손이 빈 공간을 허적였다. 그런 손을 차갑고 딱딱한 타인의 손이 한 번에 낚아챘다. 나는 어깨를 굳혔다. 일어났어? 미안해. 하지만 그것은 멀게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미안해. 그게 네가 의식이 돌아온 내게 가장 먼저 건넨 말이었다. 너의 손이 내 눈두덩 위로 내려 앉았다.

  "미안해, "라며 너는 강박적으로 사과했다.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그래도 아프지는 않잖아.

  눈가로 물기가 스멀스멀 번졌다. 눈물이었는가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였는가 알 수가 없었다. 이글 홀든. 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어나오는 것은 거센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뿐으로, 그마저도 입술이 아닌 목을 통한 것이었다. 서늘한 압감이 목구멍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졌다. 너의 손가락이었다. 이따금 제대로 된 목소리가 튀어나올 때마다 너는 마치 길을 되짚듯 이전에 짓누른 곳을 더듬었다. 목구멍을 이렇게 막아야(그 순간 아, 하는 소리가 입술로 비져나왔다) 공기가 울려 목소리가 나오나 봐. 이해하기엔 어렵지 않았으나 납득하기엔 힘겨운 말. 난 형을 미워하지 않아. 너의 손은 내 뺨을 문질렀고 널 구원할 거야, 라며 웃었다. 아직 구원할 수 있는 것들이 네 속에 남아 있을 때, 내가 아직 너를 구원할 권리를 가질 때 내가 널 구원할 거야. 네가 자꾸만 속삭였다.


  이글, 나는 그러나 네가 여전히 품고 있는 의문들에 대한 답이 될 수 없을테고,

  너는 이 말을 들을 수도 듣지도 않겠지만.


  호흡조차 할 수 없는 몸뚱어리에선 가느다란 방부제의 향이 났다.

  퀴퀴하게 썩어버린 연명에서도 냄새가 난다면 필시 이런 냄새일 것이다. 


  꿈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언제나 간단했다. 새로운 꿈으로 빠져들어선 아가미를 절개 당한 물고기처럼 허파를 쪼그라뜨려 퀴퀴한 공기를 들이켜는 것이다. 현실은 끔찍했기에 합리화를 위한 꿈을 꿨다. 결코, 도피처가 될 수 없음은 알았기에 현실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한 꿈을. 일부는 어린 시절의 것이었으며 일부는 이젠 없는 한때의 일상이었고 나머지는 내 일생 가장 죽음에 가까운 걸음을 옮겼던 하루 전부였다. 아니, 내가 죽은 날의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너는 일어나지 않을(불가능이라 여겨지곤 하는) 일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어중간한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는 갓난쟁이들에게 절박한 내일은 없었고 인간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들에 희망을 변명처럼 덧붙여 만든 엉성한 집 한 채를 자신의 마음속에 지니고 자라난다. 가끔은 알아도 알지 못하는 척을 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네게 알려준 적이나 있었던가. 너는 연장자의 권한으로 영원했던 교훈들을 스스로 깨우쳤다. 결과적으로 나는 너를 비등하게 취급했고 너 또한 그러했다. 너와 나는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어쩔 수 없는 무엇인가를 제한다면 완벽한 타인이었다. 감동적이고 허울 좋은 수직적 가족애라면 네가 아닌 다른 곳에서도 한 움큼 들이킬 수 있는 유의 것이었다하지만 그 이름과 그 피가 아니었다면 나는 넘어진 너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지도 네가 나를 따라오기를 기다리지는 않았겠지. 네가 내게 이토록 무거웠나. 책장에 베인 손가락을 입술로 가져다 물어 빨며 눈을 감았다.


  올려다본 하늘이 영영 내 것이 아니었다.




현 님 달성표 약속드린 글! 쪼꼼 더 여유가 날 때 내용도 길이도 수정될 것 같습니다! (8-8 )… 꾸준하게 연성하시는 현 님 보구 저두 힘내야긋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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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다무. 미카엘.

  인간이 가장 끔찍해질 수 있는 세월이었습니다. 6년의 길다면 긴 그 시간이 흘렀을 때엔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언젠가 몸을 뉘였던 잔디밭엔 면류관을 길게 접해놓은 듯한 철조망이 장미덤불처럼 완연했고 붉은 녹이 화엽처럼 피었습니다. 그 잔디밭 위 뛰놀던 어린 아이들은 이미 머리가 굵어 제 한 걸음조차 사리며 살아가게 된 지가 오래였습니다. 키가 반으로 줄어든 청년이 섪게 하이얀 커튼이 내려간 약혼녀의 창문을 바라보고 총 한 번 쥐지 못해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이들이 죄인이 되는 것은 흔해빠진 풍경이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듯, 혹은 되려 물레 바늘에 찔려 불가항력의 꿈에 빠져들듯 급작스럽게 자신을 되찾았습니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밀어낸 단어들은 보도 블럭 위의 구정물이 되어 자동차 바퀴에 의해 흩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인들의 바짓단에는 전쟁 전의 편안했던 삶을 갈구하는 죄악적인 외침이 검게 묻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찌꺼기들을 수여했으나 그들처럼 버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제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그것을 알려줄 노인 또한 백골이 되어버린지 오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인이요? 나는 물었다.)

(남자가 긍정했다. 그러나 더 설명하지는 않았다.)

(나는 최대한 침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후추를 먹어도 눈물이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농담은 썰렁했으나 분위기는 일세되었다.)

(그는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저는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잠시간 뜸들였다.)


  그는 신의 첫 번째 피조물이었습니다.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먹지도 자지도 웃지도 숨쉬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우는 일조차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에 귀를 대본 적도 그의 목에 손을 짚어본 적도 없었으나 심장이 없는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저는 반쯤 확신에 차 그의 손목을 쥐어보려 손을 뻗었으나 그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양 한 걸음을 물러섰습니다. 저는 약간의 우울과 약간의 분을 느끼며 지끈대는 미간을 눌러 문질렀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좋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그 직감은 이내 확신으로 변했고 저는 그날 이후 그에게 닿기 위해 노력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는 가끔 제 곁에 앉아 꼭 장례 예배를 치르는 목사님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굳이 비유를 해야만 한다면 제가 관짝에 처박혀 신의 축복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신체의 말단이 썩어가고는데 누군가 제게 구원을 약속한 기분이었습니다. 기뻐야만했는데 기쁘지 못했습니다. 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 그는 조금 아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는 더 자주 찌푸리게 되었고 그는 더 아파했습니다. 저는 그를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잠시만 물을 마셔도 괜찮을까요? 남자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게 물잔을 건넸다. 그가 멋쩍게, 그러나 당혹스럽게 웃었다.)

(그는 나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지 않았다. 잠시 일어나 내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가고 싶어한 것 같았다.)

(입술을 찡긋대며 나는 복도에 비치된 절수용 식수대가 고장났다는 사실을 그에게 어떻게 알려야 핑계처럼 들리지 않을까를 고민했다. 그는 그러나 물을 마셨고 입술을 한 번 핥은 위 자신의 베레모를 매만졌다. 그의 손톱은 세로결이 일어나 어울리지 않게 거칠었다.)

(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자주 장례식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런 일들은 이 끔찍했던 세월이 제게 남긴 값진 경험들 중 하나가 될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저는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들의 목록을 만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한 사람을 적는 것도 힘에 겨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체들은 그들의 목록에 제 이름 올리기를 작당한 것 같았고 저는 한 달 내내 검은 양복을 빼입은 채 마트료시카처럼 알맹이를 감추고 오열이 흐르는 비석 앞에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혹은, 어쩌면 저는 불청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은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 못했을테니까요. 아마 제 이름은 산 자들에 의해 짜집기되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날이 흐렸고 그 중 반절은 비가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꼭 장례를 치르기 위한 날을 골라 죽은 것 같았습니다. 우중충했습니다. 밝아선 안 된다는 강박에 걸린 것처럼. 그러던 어느날, 저는 사무적인 관계였던 한 사내의 장례식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남자는 불안에 차 있었습니다. 남자는 지금 관에 들어가 죽어있는 사내의 새끼 손가락을 잘라 계집애처럼 제 목에 걸고 있었거든요. 누군가 알아차리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면서도 그는 그 손가락을 돌려놓거나 자신의 몸에서 떼어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배 내내 관을 뚫어져라 응시했습니다.

  그는 사내의 동생이었습니다. 저는 예배 도중 한 번 웃고 말았는데 목을 가다듬듯 억지스러운 소음을 내야만 했습니다. 제가 쿨럭이자 사람들은 한 번 제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저마다의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그 이후로 관 대신 계속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웃어버린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지만 그가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말할까 걱정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나요. 소문이 싸구려 전단지처럼 돌면 저는 그 교훈적인 경험, 그러니까 장례식들을 더는 겪을 수 없게 될뿐이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남자는 관 앞에 남았습니다. 그는 카네이션을 두 송이 눈물처럼 흩뿌렸습니다. 비가 계속해 내렸으나 누구도 그에게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갈이 구르는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습니다. 남자는 저를 응시했습니다. 저는 그의 목에 걸린 작은 이빨주머니를 바라보다 뒤돌았습니다. 남자가 생각했습니다: 위선자 챌피, 적대자 챌피.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건 그의 간악한 머리로 떠올리기엔 너무 시적인 단어들이었습니다.


(그가 눈을 감았다. 그는 쿨럭이고 있었다.)

(잠시, 잠시만요. 다른 얘기를 해볼까합니다. 그의 말에 나는 그에게 다른 이야기를 해달라 부탁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고 용두를 돌렸다. 이제 와선 구식이죠? 그의 말에 나는 멋지네요, 하고 대답했다.)


  시기가 시기였습니다. 반딧불로 생을 조롱하던 사내의 하얀 방엔 고통에 겨운 병인들의 신음이 그득했고 사람들은 서로의 불행을 비교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했으나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가장 치명적이지 못한 것들을 잃은 자들은 그 속에서 침묵해야만 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저는 제 심장의 일부를 도려내 싼 값에 팔아치우고 싶었습니다.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한숨도 사라졌습니다. 저는 태어나 가장 완벽한 상태에 있었고 그것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딱히 누구에게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유의 감정이었습니다. 진실로 비참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매일같이 그렇게 눈을 떴습니다. 그가 보였습니다. 그의 시선이 저를 전반사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의 눈 속으로 들어가지도 그의 시선으로부터 튕겨나오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그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제 기억보다도 더없이 희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를 제한 방문객들은 없었습니다. 저는 한결같은 곳에서 한결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모두 죽어버렸든지 모두 죽고 싶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제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런 제 표정을 이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기민해진 것인지 모를 남자가 제 이마에 손을 짚었고 길어버려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쓸어넘겨주었습니다. 맨질한 이마에 닿은 손은 꼭 공기 같아서 축축한 수건의 서늘한 기운만을 안겨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그의 아린 먼짓빛 홍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계기는 사소했습니다. 저는 그를 본 기억이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제야 떠올랐을까 싶었을 정도로 각인은 강렬했습니다. 저는 합리적이었던 남자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얼핏 사내가 그와 닮은 것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밖으로 내는 것은 스스로에게 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척했습니다. 저는 그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고 그는 꼭 들어선 안 될 욕설을 들은 양, 이전에 제가 그를 거머쥐려 들었던 때처럼 다시금 물러섰습니다.

  아.

  저는 보았습니다. 그를요. 그의 등에 달린 날개를요. 천사같았죠. 그는 천사일 수 없었으니 꼭 천사같았습니다. 그건 공작 시간에 하얀 종이를 엮어 만든 듯한 신체 기관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날개뼈가 어째서 퇴화되지 못했을까에 대해 상상했습니다. 공상은 끊임없는 가지처럼 육속했습니다. 제가 죽었나요? 저는 물었고 사내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제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토록 유감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째서 천사를 보고 있는 거죠? 저는 화가 났고 기습적으로 손을 뻗어 사내의 뺨에 갖다댔습니다. 정확히는 갖다대려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손은 아무것도 쥐지 못했습니다. 무척 거세게 팔을 내뻗었기에 그대로였다면 저는 아마 사내의 따귀를 때렸을 것입니다만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결국 제 손바닥은 다시 한 번 비어버렸으니까요.

  저는 처음으로 그의 감정을 보았습니다. 성대를 거세당한 양 아무 말도 않던 이가 제게 표정을 드러냈습니다. 당혹도 놀라움도 아닌 서글픔이었습니다. 검은 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유의 폐기물이었습니다.


(그가 파스스 웃었다.)


  세상에. 어째서 제가 그를 잊을 수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제가 보았던 행인들이 깨어나듯 깨어났습니다. 물레 바늘은 저의 손가락을 찌르는 대신 목을 꿰뚫어 숨구멍을 틔웠고 보글보글 고인 피들이 검은 구멍으로 끓어나왔습니다. 저는 꺽꺽대며 목을 젖혔습니다. 돌이켜 보노라면 제가 그에게 욕정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들이마시고 먹어치우던 행복을 가장 노골적인 형태로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현재가 고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는 언제든 기다릴 수 있었으나 이것은 어린 아이에게 마시멜로를 쥐여준 뒤 먹지 말 것을 이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손발이 떨렸고 어금니 안 침이 고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죽었나요? 저는 물었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의 장례식에 갔었죠. 요즘 건망증이 심해졌나봐요. 말을 내뱉을수록 저는 분시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 모든 일들을 잊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큰 착각이었던 모양이었습니다. 하나 둘 잊기 위해 발악했던 파노라마가 제 귀를 파고들었습니다. 저는 한없이 작아졌고 동시에 한없이 식어들어가 단단해졌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많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감정들이었습니다.

  그는 저를 내동댕이쳤습니다. 저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의 시체를 수습했던 것이 누구였던가요. 모자를 눌러 쓴 젊은 청년이었던가요, 더는 들려오지 않는 소리들을 찾아 그의 배를 가르고 심장을 가르고 머리를 쪼개 섭식하던 괴물이었나요. 저는 목소리가 어디서부터 피어나는 꽃인지 알지 못한 채 평생 짧은 생을 보냈습니다.




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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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 조각글. 절취.

 썩 하얗지 않았다. 그의 손바닥에는 굳은 살이 있었고 굳은살이 박히지 않았던 자리에는 굳은살과는 조금 다르게도 잦은 물집으로 농이 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글 홀든의 이빨이 언제나 그런 그의 살갗을 물어뜯었다. 그 다음에는 그 살갗 아래의, 약간은 분홍빛을 띄는 여린 살이었고. 다이무스 홀든은 이글 홀든은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 그가 이글 홀든의 기벽을 이해하려 든 것 또한 아니었다. 피를 닦아내는 손수건을 쥔 그의 손을 타고 올라가 마주한 그의 손톱은 언제나 단정하게 깎여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손톱의 하얀 부분은 경계가 일정치 않았다. 제가 물어뜯어버린 탓이었다. 손톱 뿌리의 초생달과 그 결을 그래도 이글 홀든은 사랑했다. 사랑이라는 말은 참 쉬웠다. 그는 턱을 괸 채 생각했다. 다이무스 홀든은 내가 하고 있는 것도 사랑이고 네가 하고 있는 것도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는 얇다란 현관문이 그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기에 홀로 남아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이 뒤엉킨 겨울이었다. 그들은 계절이 지나 입지 않게 된(혹은 못하게 된) 옷을 정리하듯이 살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가을의 끝물 냄새가 앙상한 가지에 걸려있다 견딜 수 없게 되면 창문 새로 붉고 노오란 시쳇더미와 함께 틈입했다. 새벽녘이면 손발이 벌겋게 굳어 근질댈 정도로 공기는 이제 쨍하게 얼어붙었다.


  젖은 손을 쉰내 나는 수건에 문질러 닦았다. 손을 씻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나을뻔 했다. 오래된 수도꼭지에서는 녹내가 났고 물기를 닦아낸 수건에는 붉은 기가 묻어났다. 수도보다는 배관의 문제였다. 뒷골목과 인접한 싸구려 호스텔은 대개 이러한 형태다. 공동 욕실이 아니라는 것이 유일하게 장점인 숙소였다. 장기 투숙이었고 그리 비싸지는 않은 돈을 일시에 지불했다. 다 낡아빠진 외출용 누비아를 목에 두르고 맨발을 꿈지럭대던 앞니 없는 노파는 꼭 그 거리의 메타포처럼 끝이 검게 때 탄 뜨게를 쥐고 있었다. 건장한 사내를 어깨에 멘 청년에 그녀는 놀라울 만치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글 홀든은 자신들에게 신경을 끌 것을 그녀에게 당부했으나 마치 어쩔 수 없다는 듯 호스텔의 청소부는 홀든이 방을 비울 시간이면 문을 열고 들어와 탁자 위에 놓인 메모지를 바로하고 침대의 시트를 정리하고 타일 위 고인 물들을 멀끔히 닦아놓고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알아보려 하지도 않은 채 문을 다시 잠그고 그들의 인생에서 꺼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턴가는 들어오지조차 않게 되었다. 시트가 체액에 절기 시작한지 3일도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유쾌한 일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의 눈치를 더는 보지 않아도 괜찮아졌으므로 이글 홀든은 더욱 질펀히 뒹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배려가 필요한 개인적인 취향적 기호는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다이무스 홀든은 매 번 눈을 뜰 적이면 헛구역질을 해댔다. 진동하는 정액 냄새는 제법 지취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글 홀든은 '안타깝게도' 사디스트가 아니다.) 이글 홀든은 다이무스 홀든을 티파티에 끌려간 소녀의 곰인형처럼 소파에 가만 손을 무릎 위 모아 앉혀두었고 고개가 풀썩 오른쪽으로 대 꺾인 해바라기처럼 무너지면 작은 쿠션을 괴 바로해준 뒤 시큼한 냄새가 지독한 시트를 욱여 세탁실에 내놓았다.


  밤이 되면 건넛방의 수도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으나 다이무스 홀든은 깨어나지 않았다. 이글 홀든은 애초 잠들지 못했다. 결국 타협점으로 그들은 낮에 침대를 공유했다. 팔꿈치 안엔 주삿바늘로 말미암은 붉은 점이 질병같았고 딱딱하게 굳어진 여린 살에 반대편 팔꿈치 안에 새로운 주삿바늘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미간을 찌푸리던 그도 어느 순간엔가 말을 않게 되어갔다. 통각은 없었지만 쾌감도 없었다.


  적당하게 충혈된 눈은 세상을 담기에 용이했다. 그의 흰자위에는 장미가 피었다.

  "다이무스."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다이무스 홀든은 눈동자를 굴려 이글 홀든을 응시했다. 호명에 답하기 위해서가 아닌, 마치 귓가에서 우는 새의 정체를 알기 위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다이무스 홀든은 비의식적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없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이무스 홀든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지친 눈꺼풀을 닫았다. 다음 날,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떴고 끔벅였고 손을 들어 자신의 입 안을 굴러다니는 텁텁한 물체를 잡아 꺼내려 했으나 그에겐 팔이 없었고 손이 없었고 손가락이 없었고 마침내 포기하듯 그것을 뱉어내려 한 순간 자신에게 혓바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무척이나 비현실적인 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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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 수조.

  뿌리에 굳은 살이 박힌 젖은 손가락이 하염없이 수조의 테두리를 맴돌았다. 한 번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묻어나오는 녹가루를 바지에 비벼 닦는다. 퀴퀴한 이끼 썩는 냄새가 비강을 파고들었다. 방을 그득 메운 악취에 익숙해진지는 제법 적당한 시간이 지났다. 수면의 위를 덮은 부연 막 위로 피어나는 곰팡이가 퍽도 보드랍게 부유한다. 초점 없는 동공이 질식하듯 안방 속 들떠 팽창해 있다. 이글 홀든은 나태히 배를 드러낸 몸을 뒤집어 엎드려 수조의 투명한 유리에 뺨을 갖다댔다. 부글부글 물이 끓고 숨방울이 피어오르는 소리가 여즉 들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리가 만무했음에도 허우적대는 몸부림과 원망스러운 눈빛에서부터 흐르던 시큼털털한 감정이 혓바닥 아래 괸 것 같기도 했다. 턱을 괸 채 얇은 유리 너머의 세계를 그는 만족스럽게 감상한다.

  혼탁하게 흐려져버린 폐수를 갈지 않게 된지 며칠이 지났는가는 떠올릴 수 없었다. 다이무스 홀든의 마지막 숨은 퍽도 일렀다. 비늘처럼 저며둔 살갗이 기종처럼 부풀어 오르는 순간을 이글 홀든은 기껍게도 함께했다. 고작 몇 분이었다. 처음 하루 이틀은 하늘대며 부유하는 것에 흥미가 일어 물을 갈아주었으나 이후로는 그저 수조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며 흐르는 시간을 가늠했다. 어느 순간엔가부터는 녹아내린 살점이 썩은 물과 뒤섞여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무리 물을 갈아주어도 신체의 내부서부터 진행되는 부패를 막기란 불가능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장기를 꺼내 솜 따위를 채워넣어 박제따위를 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했던 것도 같다. 확실하진 못했다. 이글 홀든의 시간은 현재형이었고 다이무스 홀든이 곁에 있는 지금도 놀라울 정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글 홀든은 금세 싫증을 느꼈고 다이무스 홀든의 익사체는 아직까지는 가장 다이무스 홀든이다. 그와 숨을 함께하던 금붕어들의 시체가 허옇게 배를 까뒤집어 뜬다. 혈육을 닮아간다.

  이글 홀든은 대부분의 시간을 다이무스와 함께 보냈다. 귀여워했고 미워했고 가끔은 증오하다 마지막엔 사랑했다. 팔다리가 묶인 채 저항않던 그는 제 살점이 포 떠진 때에도 신음 한 점 내뱉지 않았다. 뺨에 닿는 체념의 시선에 전율이 일었다. 포기했어?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틀어막힌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신음과 붉은 고통으로 질려가는 두 눈이 꼭 값비싼 예술품 같았다. 가치를 제대로 알고 싶지 않았던, 언젠가의 저택의 복도에서 스산하게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맞이해준 그런 유의 사치품.

  채 떨어져 나가지 못한 살점들이 모양 좋은 근육 위 비늘처럼 일어났다. 이글 홀든의 손가락이 하나하나 그러한 피부를 들춰내고 하비어내 기어이 찢어낸다. 진피인지 근육인지를 건드린 탓인지 끊임없이 피가 흘렀다. 목을 베고 배를 가르는 것과는 흥미롭게도 달랐다. 벌어진 살점 새로 맺히기 시작한 핏방울은 어느 순간엔가 고인 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다이무스 홀든의 손가락 새를, 가슴팍을 타고 한 줄기씩 길을 내며 빗물처럼 떨어진다. 상당했다는 말로는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글은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다. 흉이 진다면 그것 나름 괜찮았고 죽는다면 그것 나름 황홀했다. 피로 세신한 것처럼 시뻘겋게 물든 나신은 기실 어떠한 상처를 입었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자주 기절했다. 이글 홀든은 고문에는 요령이 없었다. 물론 그는 다이무스 홀든을 고문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저, 그 행위가 ‘일반적으로는’ 고문으로 쓰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탓에 첨언한다.

  젖은 수건이 몸에 닿는 순간 다이무스는 정신을 놓은 채 한 번 거세게 튀어올랐다. 이글 홀든은 그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으나 그 이후로 움직임은 없었다. 뒈져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비늘처럼 일어난 피부의 결을 따라 핏물을 닦아냈음에도 스멀스멀 다시금 맺히기 시작하는 핏방울이 고왔다. 되려 핏물에 절어버린 것은 이글 홀든의 손이었다. 그는 젖은 손가락을 세워 다이무스의 코 아래에 댔다. 희미하게 시린 숨결이 느껴졌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로 그는 더욱 거침이 없어졌다. 제 혈육과 그 약혼녀가 기거했을 방의 한 구석에 늘어진 누비아가 이젠 다이무스 홀든의 손목을 죄고 발목을 죈다. 그 즈음,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끔적였다. 한눈에도 지쳐 있는 기색이 역력해 이글 홀든은 혀를 찼다. 전장에서의 그였다면 지독하게 선정적인 그 시선을 여즉 제게 쏘아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고고한 자존심에 먼저 끈을 놓는 것이 그일 수는 없었다. 불구하고 다이무스 홀든은 더는 저항하지 않는다. 폭력의 산물이라기엔 어색하리만치 모든 것이 하느적대며 흘러갔다. 다이무스 홀든은 이글 홀든에게 기대하는 일 없었다. 당연스러운 실망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점에 언제고 토악질이 나올만치 배알이 뒤틀려왔다. 결코 가늘지 않은 손가락이 유두를 짓이기자 다이무스의 손가락이 꿈직댄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이글 홀든에겐 충분했다.




원본. 난 지금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말만 잔뜩 하고 적지는 못하겠다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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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 죽어라. 미완.

  임무는 쉴 새없이 이어졌다. 헬리오스의 블레이드, 즉 홀든의 다이무스는 매일같이 제 검을 들었고 기계적으로 무감히도 살점을 떨쳐내며 귀환했다. 일루전으로부터 끊임없이 생산되는 타인의 얼굴을 한 기계 병사들과 낯익은 이들의 클론은 더는 그에게 감흥을 주지 못했다. 심지어 그 스스로의 클론조차 그러했다. 처음의 몇 달 간 그는 자신의 얼굴을 한 그것들의 배를 갈라내야만 했다. 그리고 작전 '일곱 개의 변주곡'이 실행된 후에는 생포를 위해 '그것들'이 죽지 않도록, 그러나 결코 일어나 그와 그의 동료들을 위협할 수 없도록 다리를 베어내야만 했다. 내장 기관들을 잘게 저며놓는다 한들 몸을 일으켜 검을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신체가 남아 있다면 통각이 거세된 클론들은 다시금 일어나 자신의 모체를 위협했다.  지옥의 불사자不死者라도 된 양, 죽음을 거절하듯 폭력적인 연명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자신의 태도를 들고 전장에 나서지 않게 되었다. 그는 점차적으로 망쇄하는 인형들에 익숙해져만 갔다.  클론들의 신체적 특징은 흉터를 제하곤 완벽히 그와 일치했으나 검만은 아니었다. 태도의 날은 자주 무뎌졌고 그는 죽어버린 클론의 품에서 앗은 양산검을 자신의 태도를 대신해 뽑아들어 전투를 이어나갔다. 이처럼 규칙 없는 전장에서 검이란 소모품이다. 그러나 영영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검은 언제나 그 날의 첫 번째 전투 이후 회수되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검날의 살점을 닦아내며 하루를 마감해야만 했다. 비린 녹은 그 수명에 있어 치명적이었기에. 다이무스 홀든은 회사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아졌고 자신의 아우의 행적을 귀동냥만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아우 이글 홀든은 그런 그와는 가장 먼 전장에서 하루를 보냈다. 지하 연합 측 배당된 게이트 중에서도 이글 홀든이 전투를 치르는 게이트에 대해선 많은 이들이 그에게 말을 삼갔다. 다이무스 홀든은 굳이 이글 홀든에게 이에 관련된 것들을 묻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저택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도 서로에게 말이 없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탓에, 이글 홀든은 단순히 대화가 귀찮다는 연유였다. 그리고 다이무스 홀든은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르고서야 제게 그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는가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펜을 든 손을 내린다. 문득 칼칼하게 타는 목에 몸을 일으켜 거실로 향한다. 그는 얇은 문짝 너머 선문답을 흘려 듣는다. 안 피곤해? 장난스러운 물음. 죽어라. 대답. 그래. 죽어라. 다이무스, 배 안 고파? 죽어라. 내가 미워?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쉬어빠진 목소리가 척수를 통한 반사작용처럼 기계적인 문장을 끊임없이 내뱉었다. 문득 칼칼하게 타는 목에 다이무스 홀든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향한다. 이글 홀든의 옹송그린 등과 텔레비전의 밝은 불빛에 음영이 진 얼굴을 응시하다 끓어오르는 듯한 앓는 소리를 듣는다. 다이무스 홀든의 시선은 '그것'을 향한다. 안구는 무기질적이었으나 최소한의 생명 활동을 주장하듯 희미한 윤기가 돌았고 고장이 난 양 수어 번을 삭아앉은 지붕 같은 눈꺼풀 속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밭은 숨을 뱉으며 이미 상실한 검자루를 찾아 손가락의 관절만을 꿈질대며 그것은 점차적으로 풍경의 일부가 되어갔다. 다이무스 홀든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글 홀든은 천천히 다이무스 홀든을 돌아보았다. 그게 다였다. 이글 홀든은 다이무스 홀든의 클론을 끌고 그들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일루전으로부터 온 클론임에 틀림없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어째서 그 클론이 지하연합으로, 혹은 그랑플람 측으로 회수되지 않았는가 의문을 품었다.

  "저것을 다이무스라 부르는 것은 그만 두도록 해라, 이글."

  시시때때로 다이무스 홀든은 혐오감에 휩싸였으나 제게 저것을 죽일 이유가 썩 있지도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글 홀든이 그것에 흥미를 여즉 잃지 않았음 또한 명정했다. 그것은 다이무스 홀든에 적대적이지도 않았으며 이글에게 실질적인 위협 또한 되지 못했다. 그 증거로, 홀든은 그것을 연명시키고 있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실패작이다, 저것은.




더 못 적을 것 같아서… 적을 수 있음 다 끝내구 싶은데 이거 한 오 분의 일도 못 적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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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 샹들리에.

  암흑이 그들을 급습하기 이전부터 울리던 비명은 어느 순간엔가 침묵으로 화했다. 무엇인가가 깨지는 소리와는 별개로 마치 각광이 돌연한 사고로 파쇄되고 면막이 머리를 내려친듯한 암전이 찾아왔다. 군중은 벙어리가 되었고 연옥이 되었고 이내 산 지옥이 되었다. 묵직한 소음이 머릿속을 채운다. 이글 홀든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뜨끈한 액체에 말을 아꼈다. 어디선가 괴괴한 외침을 삼키는 히끅임이 들려오고 불을 찾는 소란이 일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하반신이 어딘가 뒤틀린 양 아려온다. 깨진 유리로부터 비산한 파편이 찢어놓은 눈꺼풀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이글 홀든은 손가락을 더듬었다.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객석의 아래서 지분대던 연인의 손가락을 여전히 그의 손에 깍지를 낀 채 단단히 움켜쥔 채다. 희미하게 어둠 속에서 오가는 인영들이 보였으나 눈을 한 번 끔적이자 이내 어둠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는 이 어둠에 익숙해지기를 포기한다. 다이무스. 속살거리는 목소리는 아비규환 속 유일한 설움처럼 느껴졌다. 그는 다이무스 홀든을 바라보지 않은 채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던 검은 천장을 응시했다. 그의 침묵하는 눈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것이 과연 핏물인지, 뚫린 천장으로부터 떨어지는 빗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글 홀든은 그의 머리 위로 빛이 쏟아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금박된 샹들리에의 지지대 첨단이 다이무스 홀든의 안방을 짓뭉개고 촛대를 쑤셔넣던 그 곱던 순간. 다이무스 홀든은 이글 홀든을 밖으로 밀쳐냈고 이글 홀든은 다이무스 홀든을 안으로 밀쳐냈다. 장식에 불과했던 수정들이 그의 머리 위 으깨져 유리꽃처럼 여즉 꺼지지 못한 촛불들의 일렁임에 빛났다. 채 1초가 되지 못하는 짧은 순간이었다. 이글 홀든은 다이무스 홀든의 싸구려 회백질로 덧바른 듯한 시선을 마주했다. 이글. 그리고 그의 입모양을 읽은 뒤 더없이 유쾌한 기분이 되어

  웃었다. 다이무스의 동공이 경악으로 잔물지고 형체 없이 어그러지기까지는 들숨 한 번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이 무너졌다. 그가 땅으로 꺼졌고 빛이 사라졌고 비명이 들려왔고 이글 홀든의, 조금 더 그 광경을 붙잡기 위해 감지 않았던 눈 속으로 유리 조각은, 아, 씨발, 이건 정말 환장하게…… 좋았다. 이글 홀든은 자신의 눈을 움켜쥐었던, 다이무스 홀든의 손을 억척스럽게 쥔 손의 반대편 손을 떼어내 허공에 털었다. 겉만이 바삭하게 말라붙은 핏방울은 마치 덜 굳어진 풀처럼 속을 토해내며 허공이 흩날렸다. 이글 홀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한다. 여전히 홀은 어둠 속이고 보이는 것은 없고 그의 오른 눈은 씨발스럽게 저며온다. 그는 다이무스 홀든을 밀어내는 것에 있어 망설임이 없었다. 그리고 부가적인 행운으로, 다이무스 홀든의 유언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사실에 그는 발기했다. 텁텁하게 말라붙은 목구멍으로 웃음이 비져나오고 어둠 속에서 피가 묻은 손으로 그는 깍지 낀 다이무스 홀든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풀어낸다. 그리고 흉흉한 아래춤을 다이무스 홀든의 둥글게 경직으로 굳어진 손에 끼워 요분질시킨다. 그 억센 팔을 타고 흐르는 빗물인지 핏물인지를 윤활제 삼아, 퍽도 매끄럽게. 두어 번의 분탕질만으로 그는 사출했다. 달뜬 숨이 돌아가버린 눈 밑으로 스미어 나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는 끈적한 액체가 엉겨 붙은 다이무스 홀든의 팔을 대리석 바닥 위로 떨군 뒤 바지춤을 정돈한다. 이글 홀든은 다이무스 홀든의 널부러진 손바닥을 아래로 뒤집어 준 뒤, 고개를 치켜든다.

  이 일련의 황음이 한 편의 연극처럼 흐르고서야 저 멀리서 다가오기 시작한 희미한 불빛은 차라리 죽어버린 그에 대한 기만에 가까웠다. 이글 홀든은 램프에 의지한 붉은 눈동자들이 저를 향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를 책망해야하는 다이무스 홀든에게는 이제 눈이 없다. 허브리스는 언제나 이 사랑스러운 주인공을 벼랑으로 떠민다. 그는 쾌락에 비틀린 입술을 애써 아래로 꺾어 앙문다. 괜찮으십니까? 촛농에 눈을 데인 여자는 잔물잔물한 눈가를 화급히 가리며 램프를 향해 비명을 지른다. 치워요! 치워! 당장 치워요! 그 불을 치워요! 램프! 램프를 줘! 정돈되지 않은 고함소리가 무너진 방죽을 넘어 쏟아지는 썩은 물 같았다. 램프를 든 유일한 사내가 램프를 든 손을 치켜들어 조금 더 넓은 곳에 빛이 닿도록 했다. 사람이 더 올 겁니다. 박스석의 조명을 켤 거라고…… 그는 말했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한 연인들, 부부와 아이들은 안도했고 방사형으로 뻗어나온 샹들리에 아래의 팔다리들을 확인한 이들이 절규했다. 그리고 이내 막을 재차 걷어올리듯 박스석의 칸마다 하나하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글 홀든은 잠시간의 고민 뒤 절규하기로 했으나…… 그건 그리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 되었다.

  이글 홀든은 그 누런 불빛에 의지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쓸려나간 자욱이 선명한, 피에 젖은 손바닥과 시선을 조금 내린 곳에 자리한 다이무스 홀든의 팔은 어느 순간엔가 흔해빠진 장면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 연인은 죽음마저도 그를 멋질리게 만드는 낭만이 있었다. 참, 그는 말을 아낀 것이 아니다. 그저 필요하지 않았던 것 뿐이지. 다이무스 홀든이 그토록 아름다웠고, 그의 죽음은 차라리 이글 홀든을 위한 완벽한 레제 드라마에 가까웠다.




원본. 다이무스 샹들리에에 처맞아 죽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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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 첫 번째 형.

  다이무스 홀든은 어째서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가 알지 못한 채 살해당하는 과정에 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죽음은 불필요했기에. 그리고 이글 홀든은 맹목적인 상냥함 아래서 다이무스 홀든을 살해하는 과정에 있다. 바닥에 널부러진 팔을 주워드는 손길이 여상하다. 손등에 마찰하는 식어빠진 뺨은 무감이 피어올라 백합처럼 지독하게 개화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아, 죽이고 싶다.' 파괴적인 욕구나 원초적인 성애와는 동떨어진 조금 더 생존에 가까운 중얼거림이었다. 네가 나를 내친 것에 미워서도 증오스러워서도 아니었어. 아마 다이무스 홀든이 조금 더 이성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런지도 몰랐다. 그는 이 모든 일이 보복성이라 생각치 않았다. 이글 홀든은 마저 희게 웃는다. 그냥, 불현듯 허기가 지는 것처럼. 그는 다이무스 홀든의 저 굳어진 표정 아래 어떠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이무스 너도 내가 이런 소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잖아. 뭐…… 멋쩍은 듯 눈가를 살금 찌푸리며 이글 홀든이 한숨처럼 내뱉는다. 어찌 되었든 할 거지만.

  "형은 키스 한 번과 고백 한 번이면 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이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음, 이건 다시 못 붙이겠다. 끌하고 혀를 찬 뒤 잘 손질된 정육 같은 팔을 바닥 위로 내던진다. 묵직한 소리. 다이무스 홀든은 바르작대며 자신의 오른팔을 줍기 위에 오른손을 뻗는다. 관념적인 몸짓이다. 이글 홀든은 자신이 즐거운가를 고민한다. 유쾌한 기분은 아니 되었으나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숙여 다이무스 홀든의 바닥을 향한 왼손바닥을 쥔다. 천천히 관절 마디마디를 아프지 않게 주물대며 주머니에 줄곧 잠들어 있던 반지를 꺼냈다. 별다른 장식이 없는 간단한 모양새의 반지였으나 그만큼 다이무스 홀든에 어울릴 수는 없었다. 왼손 약지를 관통하는 시린 감촉에 다이무스 홀든은 말을 잃고 만다. 시멘트 바닥에 처박힌 고개가 간신히 이글 홀든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간다. 이글 홀든은 그 시선 속에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증오와 충격을 읽는다.

  "정말 이렇게 될 걸 몰랐어?"

  잘게 웃었으나 동시에 말한다. 이건 네가 자초한 거야.

  보랏빛으로 질려가는, 바닥 위를 구르는 다이무스 홀든의 잘린 오른팔을 주워 든다. 그는 그것을 다이무스 홀든의 왼손에 쥐여 준다.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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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다무. 잔류. 조각글.

  묻어줘. 그의 말은 이해하기엔 너무도 멀었고 졸렬한 변명과 함게 다이무스 홀든의 뇌리를 스쳐 그의 망막 아래 떨어졌다. 옥다문 입술을 두드리던 혓바닥이 차게 식고 뺨을 쥐는 손가락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이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언제나 흔적없이 사라지는 눈처럼 아침이 그들의 품속에서 기미없이 암암했다. 노란 꽃물결이 죽어 밀려온다. 다이무스 홀든은 이끼가 낀 비석에 머리를 뉘인다. 음각된 이름자에 괸 물기가 그의 뿌리 속으로 검게 파고든다. 머릿속으로, 그의 눈동자 속으로 침투한다. 그는 돌린 뺨에 닿아오는 화분의 온도를 알지 못했다. 매일 아침 들이키던 반 잔의 물, 이름모를 새들새들한 풀쪼가리의 흙이 축축하게 젖어들도록 들이붓던 반 잔의 물, 히카르도 바레타의 손, 자신의 어깨, 목덜미, 입술. 히카르도 바레타의 단언처럼, 다이무스 홀든은 확실히 그 만큼이나 원예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다. 불구하고 내동댕이 친 화분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 또한 발목 잘린 감정의 일부다. 그는 바레타의 감정을 강물이 불어나듯한 사랑땜으로 여겼다. 히카르도 바레타는 정정하지 않았고 오해는 이끼처럼, 곰팡이처럼 다이무스 홀든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몸을 일으킨다. 흩어진 검은 흙더미를 그러모아 구둣굽으로 파낸 옅은 구덩이에 뿌리 상한 잡초를 욱여 넣는다. 부둑부둑 아스라진 회상의 살점에선 낡은 박종이의 냄새가 났다. 흰 머그에 반절 담긴 물이 조록 떨어진다. 다음 날도 다음 달도 다음 해도 볼된 걸음을 계속하며 비석에는 이끼가 낀다. 다이무스 홀든은 무젖어 울었다. 습벽으로 굳어진 일상에 이미 푸새는 죽어 있다. 바레타의 이름은 푸르게 젖는다. 여전히 깨어진 화분도 배를 드러낸 채, 그 품 아래, 등걸잠에 죽어 있다.




조각글. 캐스커의 편지 들으며 믹향 님 썰[각주:1]로!




  1. http://mikhyangnim.tistory.com/entry/14080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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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렉다무. 너의 꿈. 창문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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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린 날이다. 굽굽하게 시린 공기가 창밖을 돌고 비가 올 바람이 분다. 마치 물 속에서 숨을 들이쉬는 것처럼 고로록대며 공깃방울이 목구멍으로 금방이라도 빠져나올 것만 같다. 유난하게 무거운 정장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바로 걸며 동시에 목을 된 넥타이를 끌러 내린다. 쪼크라든 방향제가 역할만치 지겨운 라벤더 향을 토해낸다. 좁쌀만한 벌레들이 죽어 있는 반고체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주니가 일어 억눌린 숨을 내뱉는다. 그러니까, 달갑지 못한 겨울의 초입이다. 작년 겨울 즈음 옷장에 처박아둔 좀약이 여즉 효과를 보고 있을런지는 알 수 없다. 두터운 옷가지들을 하나둘 꺼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으나 상자들을 풀어내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썩 유쾌한 일은 아니 된다. 손목을 단추를 풀어내고 셔츠를 벗고서야 깃에 묻은 잉크 자욱을 알아차린 홀든은 혀를 차며 옷걸이로 향하던 손을 거둔다. 클리닝을 맡겨야할 성 싶다. 냉장고에서 꺼낸 맥주 한 캔을 따며 버티컬을 걷어낸다. 부연 김이 부자연스럽게 서린 창문이 드러난다. 다이무스 홀든은 잠시간 고민하다, 그 위로 한 문장을 새끼손가락을 들어 적어내린다.


거기 있나Bist du das?


  그는 창문을 응시한다. 그토록 조심스레 숨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매번 이 짓을 반복할 적이면 그는 제가 기어이 미쳐버린 것은 아닐까 잦게 고민한다. 그로선 일상에 납득될 수 없는 비상식 탓이다. 다이무스 홀든은 걷었던 버티컬을 반즈음 다시금 내린다. 그의 글씨는 금세 희미한 자욱을 남긴 채 희붐한 창에 스며 사라진다. 많은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되는 버릇이다. 냉장고의 맥주 캔을 꺼내 따며 다시 한 번 일별하나 달라진 것은 없다. 옷소매에 팔을 꿴다. 간밤의 꿈이었나. 그는 세뇌하듯 중얼거린다. 꿈Traum. 퍽 멀게만 느껴지는. 다이무스 홀든은 꿈을 꾸지 않는다. 적어도 그가 기억하는 한 그는 그러하다. 그는 조금 더 그 단어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침대의 프레임에 등을 기대 랩탑을 연다. 숫자들과 익숙한듯 낯선 이름들이 즐비한 화면이 희게 그의 얼굴을 비춘다.

  이런 일들은 대체적으로 시간을 죽이기에 적합하다. 공백이 껄쩍한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 누구도 다이무스 홀든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퍼센티지의 기입을 끝마친 뒤에도 타자 소리는 고막을 두드리는 듯 하다. 그는 고개를 젖혀 매트리스 위 정수리를 지그시 누른다. 그리고 침대의 오른편 자리한, 반쯤 올라간 버티컬의 루버 새로 시선을 향한다. 뒤집어진 시계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눈에 띄는 것이 있,

  다이무스 홀든은 몸을 일으킨다.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카페트 위로 엎어져 떨어진 랩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의 짚은 손등을 찍는다. 고통을 감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버티컬을 걷는다. 그는 뒤집혀진 글자를 본다. 꿈. 이건 꿈속인가. 그는 당황한다. 그는 먼지 하나 끼지 않은 창틀에 손을 얹는다.


독일어German?


  뒤집힌 문장이 얘기한다. 아니지, 이 말은 어폐가 있다. '누군가'가 뒤집힌 문장을 적는다. 다이무스 홀든은 자신이 여전히 꿈을 꾸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창틀이 아닌 유리 위 손을 짚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몸을 지탱한 손바닥을 떼어낸다. 지문 자욱 골 새로 우울한 습기가 차오른다.


너 거기에 있구나You ARE there. 너는You are,


  손날으로 쓸어 흔적을 지워낸다. 다이무스 홀든은 그 문장을 읽지 못한다. 다급하게 휘갈긴 글자는 불구하고 무척이나 오랜 세월을 넘어온 듯 한 줌마다 잔등같은 불안이 그득하다. 그는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자꾸만 시선 속으로 파고드는 투명한 글자들을 아낌없이 머릿속에 눌러 담는다. 그러다 문득 축축한 감각에 아래를 응시하자 점차적으로 웅덩이를 넓혀가는 액체가 있다. 다이무스 홀든은 화급히 옆으로 기울어진 맥주 캔을 바로한다. 시큰한 알코올의 향이 시트 위로 스며든다. 그는 심호흡을 하는 듯 마는 듯 어정쩡한 한 숨을 들이킨 뒤 부엌으로 걸음을 옮겨 희게 빨린 행주를 집는다. 맥주에 입을 댄다. 김이 빠진.

  그는 다시 침대로 돌아온다. 창문은 마치 저 자신이 생명을 지닌 양 많은 것들을 토해냈다 주워담기를 반복한다. 멀뚱히 손에 축축한 천을 든 채 응시하자 다시 한 번 더, 글자가 사라진다. 유리에는 손자욱이 그득하다. 마치 어린 시절 마주했던 칠판처럼. 서툰 지우개질. 다시. 더는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없다. 아마도, 누군가는 창에 김이 차오르기를 기다린다. 20여 초가 남짓한 시간이다.

  길다. 자신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 20초가 수어 번 흐르고서야 다이무스 홀든은 건너의 누군가가 헤매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다이무스 홀든의 검지 손가락은 두어 번 유리 위를 배회하나 선 하나 긋지 못한다. 그는 결국 손을 내린다. 무엇인가를 회피하듯 젖은 이불을 말아 카펫 위에 떨군다. 여즉 엎어져 있는 랩탑을 바로 해 닫고 충전기를 꽂아 넣는다. 끔벅이며 점멸하는 붉은 등은 할로겐 전구의 누런 빛을 받아 더욱 유난하다.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들자 누군가의 말이 그를 반긴다.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깜박인다.


  갓 전쟁이 끝났어The war just ended.


  전쟁─아프간인가. 자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에 대해, 또한 그는 자신이 이 비상식에 점차적으로 복속되기 시작한다는 생각을 한다. 다이무스 홀든은 어떤 말을 적어야하는가 고민한다. 그 짧은 간극, 건너편의 누군가는 문장을 다시 씹어 삼킨다. 투명한 유리만이 남는다. 이곳은…… 비가 내리는 모양이다. 투둑대는 소리. 유리창 너머로 아스팔트 길이 보인다. 신호등이 푸른 색으로 바뀌고 행인들은 횡단보도를 건넌다. 아침 출근길 그는 제법 큰 사고가 있었던 것을 떠올린다. 검은 타이어의 마찰 자국이 인위적인 전선처럼 늘어진다. 김이 서린다. 현실이 사라진다.


너는 사라졌어You are gone.

내가Am I?

응, 네가Yes, you are.


  색채 없는, 투박하고 굵은 그 필기체를 응시하다 창에 손가락을 가져다댄다. 빗방울이 떨어져 다시 글자들을 지운다. 긴 팔을 껴입은 행인들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감는다. 빗소리가 들린다. 무겁고 가깝다. 다이무스 홀든은 자신이 적은 멍청한 문장을 지운다. 김이 서리는 속도는 조금 더 느릿하다. 그는 유리창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둥글게 오므려 더운 입김을 분다.


나는 여기 있다I AM here.

하지만 여긴 아니지But NOT here.


  지독한 두통이 인다. 창문을 짚은 손이 천천히 미끄러져 시린 창틀 위로 떨어진다. 다이무스는 문득 울먹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는 유리 위 이마를 댄다. 금세 이마는 축축해진다. 다이무스 홀든은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마치 강제적으로 전개된 우주의 한가운데서 밭은 숨을 뱉어내는 기분이 된다. 그의 손가락에는 무게가 없다. 이마에서 뺨으로, 뺨에서 입술로 그는 미끄러진다. 심장은 비산할 듯, 흉곽을 흉포히 찢어발길 듯 박동을 빨리하고 핏줄이 돋은 손등은 한 겹 남은 시트를 움켜쥔다.

  다이무스 홀든은 발작적으로 버티컬을 끄집어 내린다. 세상이 사라진다.

  아니, 사라진 것은 창문이다. 창문은 결코 세상으로 확장될 수 없는 개념임에도 그는 그것을 망각한다.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감는다. 침대에 걸터 앉은 채 호흡을 고르다 발치에 치이는 이불 위로 발을 뻗어 짓이긴다. 고개를 젖혀 입술을 벌린 채 몇 번이고 날숨을 뱉는다. 뒤로 뻗은 팔이 자신이 목을 조를 것만 같은, 그런 있을 리 만무한 상상을 한다.

  이변이다.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기를 반복한다. 떨려오는 폐부를 만질 수 없음에도 배를 누른 채 천장을 올려다 본다.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을 슬퍼해야하는가.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오랫동안 앓을 기미다. 그는 타인의 글자를 보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으레 그러하듯, 고질적이고 본질적인 충동처럼 그는 루버의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그 틈을 벌려낸다.


Me haces falta.


  아.

  사라지지 못한 문장과 함께 그의 입술 새로 장탄식이 역류하는 꽃처럼 흐른다. 그 울음도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내 물방울이 되어 사라진다. 빗방울은 창밖으로 흐른다. 한 방울 두 방울. 비는 이렇게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린다. 창문 너머, 행인들은 우산을 쥐고 있지 않다. 비는 오지 않았다.


#

  다리오 드렉슬러는 커튼을 닫는다. 더는 대답이 없다. 드렉슬러, 입관할 시간이야. 조노비치의 음성은 침잠되어 하수구 속 검은 물처럼 진득하게 그의 입속에 고인다. 그의 꿈도 죽어 있다.




  뒷내용 더 있는데 못 적겠다…… 우리 어머니는 왜 내게 빨간펜을 시키지 않으셨는가…… 씽크빅이나 함 시작해볼까…… 언젠가 적겠지.


1) 다이무스 홀든은 다리오 드렉슬러의 꿈이었다. 비가 아니야, 홀든, 그건 비가 아니야.


2) You are gone을 '네가 사라졌어,'라고 적으려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이무스는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니까, 드렉슬러가 '너는 사라졌어,'라고 마치 누군가를 가르치듯, 그게 남아 있는 진실이라는 듯 적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조금은 어색하지만 저렇게 적어버렸다. 다이무스가 어느날 창문 밖에 뒤집혀 적인 문장을 발견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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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무다무. 앙크르.

  서걱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네 일상인가. 이해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으나 납득하기는 힘든 구석이 있었다. 나는 너의 태도와 전장의 너만을 고대했다. 너로서의 내가 지닌 마지막 기억들은 대체로 날붙이나 감흥없는 흑백 화면에 불과했기에 전사되어 그대로 이어붙인 필름 같은 이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제서야 너와 나 사이엔 일상적인 대홧거리가 퍽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네가 나의 대답들을 알고 있는가는 모르겠으나 나는 확실히 너의 대답들을 알고 있다. 너는 오전 6시에 일어났고 오전 7시에 출근했으며 17분 즈음 지나치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가장 값싼, 얇은 햄쪼가리가 든 역겨운 빵을 역겹다 생각하면서도 배를 채우기 위해 꾸역꾸역 입에 처넣었다. 그리고 은행으로 가 대출 상담 따위를 돕고 점심을 굶은 뒤 늦은 저녁 귀가해 끼니를 대신할 커피를 내리고선 만들어서라도 가져온 서류철을 책상 위에 펼쳐 펜을 든다. 꼴사나운 염탐조차 없이 내 기억 속의 네 생활이었다. 너는 변화를 싫어하는 녀석이니 아마 지금도 그렇겠지. 다만 무엇인가 많이 달랐다. 안타리우스를 나온 뒤, 너는 어떻게 지냈지? 몇 번 입속에서 굴리던 그 질문을 시치름하니 감춘 채 묻는다.

  "벨저 홀든과 이글 홀든은 어떻게 됐지?"

  시린 분위기를 일세하듯 턱 아래 낀 깍지를 굳은 어깨와 함께 풀어내며 내뱉었다. 내리깐 시선 속 검은 정장 위 드문드문 네 하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으나 굳이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나는 네게서 재미를 보지도, 그렇다고 제법 눈물겨운 반쪽의 재회를 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대가리를 깨뜨리며 신이 나게 싸우지도 않았는데 네 흔적이 내게 남아 있다니. 내가 이 곳을 걸어 나가 네 모든 기억을 지우고 안타리우스로 돌아간다 한들 현재가 없어지지 않는다니. 너는 잠깐 싱둥겅둥 당근을 자르던 손을 멈추었고 그와 동시에 뒤돈다. 경멸에 찬 바그라진 시선이 내 미간에 즉각적으로 떨어진다. 그 어설픈 증오에 숨이 가빠왔다. 너는 네가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게 있어 불가해한 영역이다. 너의 미움은. 신기하지.

  "네가 부를 이름들이 아니다."

  "너도 알잖아? 녀석들은 제법 걱정할 가치가 있는 녀석이야."

  "너와 그들은 아무 관계도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다."

  너는 그렇게 말했고 나는 네가 쥐고 있는 칼을 휘두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하는가를 고민한다. 아, 그래? 내가 내 동생의 안부를 걱정하지 않으면 누가 해주지? 빈정대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꺼내지는 않는다. 네가 남았군. 부지중 입밖으로 중얼대자 너는 정말 검을 빼 들 표정이다.

  너는 홀로 지내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있었음에도. 몸을 일으켜 네 뒤로 다가가 목덜미마저 결벽한 허연 셔츠 깃에 손을 뻗어 접힌 부분을 펼쳐내자 너는 오한이 이는 듯 한 번 어깨를 희미하게 떨었다. 불쾌하다는 뜻이다. 이런 곳에서 고상하게 말 한 마디 없이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꼴이 우습기 짝이 없다. 허. 기가 차 한 번 조소하곤 다시 늘어지듯 소파에 뉘인 몸을 한 번 옆으로 굴려 시선을 협탁 위로 향했다. 재미없긴. 손을 뻗어 엎어진 액자의 조임새를 더듬었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액자였으나, 이 아래 무엇이 있는지는 안다. 너의 어린 시절이다.

  나는 그저 네 날갯죽지 아래서 스쳐가는 과도기가 행복했다. 배양기 속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목검을 쥔 채 휘두르던 어린 너였고 아우들에게 단내나는 과일을 밀어 양보하던 너였고 회초리 자욱이 선연한 허벅지에 분한 듯 입술을 깨문 채 숨 죽여 이불 밑에 은닉하던 너였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엔 네가 없었다. 나는 네가 본 풍경들을 답습하며 타의에 성장했다. 나는 네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해하지 못했고 너는 그것이 어찌 되었든 그런 나를 증오한다 표출한다. 내가 너의 기억을 훔쳤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몰랐다(모체들은 그런 부분에 있어 생리중인 계집년들처럼 민감하기 짝이 없었다). 혹은……

  눈가를 데우는 뭉근한 열기가 여전하다. 기분은 제법 유쾌하지 못하다. 나를 알지 못하는 너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이로서 대강 6만 시간이 넘어가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기대했던 것보다는 제법 잘 참았네. 눈을 굴리며 네 뒤통수를 말끄러미 노려보다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장하군.

  "이봐, 자아에 적대적인 성실한 노동자 씨, 오늘은 좀 기분을 푸는 게 어때?"

  결국 액자를 들추지 못한 채 요리를 하는 네 뒤통수를 향해 내뱉는다. 네가 나를 한 번 더 돌아본다. 여전히 대답은 없다. 네 표정은 금방이라도 까슬한 머리카락을 잡아채 좆을 물리고 싶을만치 선정적이지만 분노를 성욕으로 돌려 돋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식욕에 관련된 문제기도 하다. 나는 너를 만나기 위해 문 밖에 서 이틀을 굶어야 했다. 그 즈음이면 내가 '네' 잘난 동생들 중 하나인 이글 홀든 정도라도 알기 마련이다: 너는 나를 알고 있고, 나를 명백하게 피하고 있었다.

  그럴 거면 아예 이 땅을 떠났어야지. 아름다운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숨 죽인 구렁이들을 베어내고 살갗을 지져 재생 불가하게 만들었어야지. 맛적은 흥얼거림이 절로 튀어나온다.

  "네가 널 만나 기분이 엿같은 건 알겠지만 오늘은 널 강간하러 온 게……"

  "……그만!"

  그리고 네 외침. 그럴 이유가 없었음에도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너는 네 이마를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짧은 머리카락이 굵직한 손가락 새로 우시시 억세게 비져 나온다. 제발 그 입을 다물어라. 부탁이다. 그 말이 주는 어폐에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부탁? 네가? 별 일이군. 여상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그 절박함에 푸슬푸슬 마른 웃음이 튀어나왔다. 만성적인 두통이 다시 밀려오는 듯 두어 번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너는 눈을 뜬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마치 너 자신에게 필요한 문장처럼 이런 말을 내뱉는 것이다:

  "너는, 내가 아니다."

  그래, 나는 네가 아니지. 당연한 얘길 당연하지 않게 하는 것만큼 멍청한 짓이 어디 또 있을까.

  "너와 같은 유전자에 네 첫 몽정이 둘째 동생에게 강간당한 다음 날이었다는 것과 네 유서가 든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지만 나는 네가 아니지, 다이무스 홀든."

 네 살갗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리고서야 너는 내가 네 앞으로 다가온 것을 알아차린 듯 싶었다. 그리고 너를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내가 아니지. 손을 뻗어 네 양 뺨을 쥔다. 광대 위 십자로 난 흉터의 질감은 여타 피부와 다르게 오돌토돌했고 약간은 민들했다. 목덜미를 타고 각진 어깨를 지나 네 팔꿈치를 더듬던 손이 마침내 네 손을 감쌌다. 억지로 쥐어잡은 그 손을 들어 쥐인 음식물 찌꺼기가 묻은 민날을 왼뺨에 가져다 깊게 짓누른다. 금세 시큰한 감각이 밀려왔다. 고기를 써는 감각이다. 우스운 것은, 내 손바닥 속 너의 손가락이 여즉 이 껄쩍한 식칼을 놓지 않은 채 목숨줄처럼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는 내가 바끄럽나? 네 모든 추악함을 모다 격리시킨 내 몸뚱어리가 저주스러워?"

  손등으로 뺨을 훑어 계속해 흘러내리는 핏물을 훔쳐냈음에도 제법 깊은 곳을 건드린 모양인지 지혈이 되지 않았다. 제대로 그었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너와 같은 십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네가 나를 분필로 그어둔 문짝 만큼은 기억을 해주겠지. 날을 쥐어 네 손에서부터 식칼을 앗았다. 바지 안으로 단정히 넣어 입은 네 셔츠를 밖으로 끄집어 내 피가 묻은 날을 닦아냈다. 시뻘겋게 젖어든다.

  "무슨 짓……!"

  "이번엔 네가 닥쳐, 다이무스 홀든."

  부탁이니까. 그러자 너는 입을 다문다. 허리를 숙여 네 배에 고개를 묻은 뒤 붉게 젖은 셔츠에 얼굴을 닦아냈다.




앙크르ANCRE. 이것저것 더 적고 싶었는데 글이 안 적혀서 다 잘라냈더니 기분이 묘하다! (ㅠ-ㅠ ) 7월 다 가기 전에 그래도 하나라도 적으려고 했는데 결국 8월이 되어버렸다. 사이퍼즈 한도가 풀렸으니 이제 그랑블루나 애들 입혀줘야겠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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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벨저. 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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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보다 뼈라는 건 촘촘해서."

  벨저 홀든의 검이 다이무스 홀든의 손등을 꿰뚫는다. 확장된 동공과 코를 통하지 못한 채 입으로 토해지는 밭은 숨에서는 후끈한, 체온 이상의 비이성이 신열처럼 들끓고 있었다.

  "이 정도로 헐거워지지는 않아, 다이무스."

  검자루를 쥔 손을 천천히 들어올리자 검날이 살갗을 빠져나오는 대신 신경이 끊겨 늘어진 팔이 고깃덩이처럼 도축되어 검신에 달려 올라온다. 시린 대리석 바닥에 코를 처박은 다이무스 홀든은 한쪽 팔을 그리 들어올린 채 끊어질 듯 호흡했다. 풀린 눈이 허공을 향한다. 그 말인 즉슨, 벨저 홀든을 향하고 있지 않다. 벨저는 검에 꿰인 다이무스의 손등을 제 두 손으로 쥐었다. 바닥이 대리석이었던 탓에 날이 손바닥을 꿰뚫지는 않은 모양이다. 천천히 그 손을 쓰다듬고 입 속에 손가락을 머금었다. 두어 번 타액으로 범벅이 될 만치 다이무스의 마디를 핥아낸 벨저는 한 손으로 다이무스의 손바닥을,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검자루를 쥐었다. 그리고, 세게 밀어넣는다. 끼긱이며 걸거치는 쇳소리를 낸 날이 손바닥을 꿰뚫고 반대편으로 튀어 나왔고 벨저의 손가락 끝에 날의 번들대는 선단이 닿아왔다. 이 모든 감촉을 음미하듯 눈을 감은 채 미소 지으며 시를 읊듯 다이무스의 귓가에 속살댄다.

  "검이 한 자루 더 남은 것 같아."

  손에 더욱 힘을 주어 손바닥을 깊게 검신에 마저 꿰어 넣는다. 다이무스의 어깨가 발작하듯 움찍한다.

  "어떡하면 좋을까, 다이무스."

  그의 손등이 마침내 검자루에 걸려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된 지경에서야 벨저는 손에 가한 힘을 풀어냈다. 퉁하는 소리와 함께 쨍한 검신의 소리가 들려온다, 다이무스 홀든의 오른손이 바닥 위로 추락한다. 벨저는 질끈 닫긴 그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까 뒤집으며 드러난 흰자에 입 맞췄다. 간헐적으로 경련하는 어깨를 쥐어 바닥으로 내리 누르는 손길이 마치 어린 아이를 누르듯 했다.

  "형, 아직 잘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참을 수 없는 희열이 마침표마다 뚝뚝, 더는 붉어질 수 없을만치 낭자했다. 날은 다시 한 번 애가지 같은 왼 뺨 위에 생길을 내며 피를 뿌린다. 대칭적이네. 마음에 들어. 옥깨문 입술은 보랏빛으로 물든다. 어젯밤처럼. 오늘도.


#

  경보음처럼 울리던 파도가 수챗구멍으로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내내 추억하던 네 머리카락 한 줌이었다. 책꽂이의 악단은 연주되는 일조차 없이 등한시 되었고 너 또한 피아노의 줄에 손가락이 베여 한참을 싸물고 있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가조차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웃고 말았다. 자고 있지 않잖아. 너는 추궁했다. 맞아, 안 자고 있으면서. 너 또한 추궁한다. 부어오른 목구멍이 쓰라려 입 속에 고인 침을 삼켜낼 수가 없었다.

  "우릴 사랑하지 않아?"

  너희가 잔망스럽게도 웃었다. 정해진 대답을 인지하고 있는 탓이다. 내 대답을 너희가 알고 있는 탓이었다. 너와 너, 그리고 나. 나는 자주 혼란을 겪는다. 

  "때리지 않을게, 정말이야."

  그와 동시에 손등의 도드라진 뼈로 너는 내 뺨을 내려 찍었다.

  "많이 아파하지 마."

  그리고 나긋한 목소리로 너는 비뚤어진 내 고개를 바로해주었다. 눈 뒤편에서부터 시큰하고 축축한 것이 꿀렁이며 흘러내렸다. 반쯤 벌어진 입술 새로 찝찌름하고 비린 맛이 느껴졌다. 인중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피라는 것을, 턱에서 방울져 허벅지 위로 흘러내리는 붉은 것을 보고서야 알아차렸다.

  "입술을 다물어 볼래? 침이 흐르잖아."

  너는 우습게도 나를 타박했다. 너는 조심스럽게 엄지로 내 턱을 훑어 훔쳤고 입을 맞춘다. 입 속에 고여 있던 피가 섞인 타액이 네 목구멍을 타고 꿀렁이며 넘어갔다. 벨저. 네가 불만스럽게 내뱉었다. 얼굴을 때리다니, 경박하구나, 이글. 그러자 네가 한숨처럼 답했다. 네 입술이 붉었다. 비강에 괸 핏물이 자꾸만 기도로 울컥울컥 넘어만 갔다. 입 속을 쑤시는 손가락이 목젖을 건드렸고 토기가 치밀었다. 나는 그러나 기침했다. 폐부를 들어낼 듯한 고통과 함께 혓바닥 위로 자꾸만 핏물이 터져 나왔다. 네 하얀 머리카락에 점점이 붉은 꽃이 피었다. 하지만 네가 보는 화원은 나와 조금은 다른 것 같았다.

  "파란 꽃이 피었네."

  네 손가락이 불구하고 내 광대 위를 더듬는다. 알싸한, 근육을 짓누르는 형태의 고통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예뻐. 벨저 너는 중얼거렸고. 예쁘네. 이글 너 또한 속살였다.




RT 감사합니다! 손에 관통상, 입가의 터진 상처, 코피, 헛구역질, 각혈, 뺨에 칼자국, 피멍 적었으니 남은 건 탈골, 골절상, 화상, 물고문, 만신창이네요…… (^ㅡ^ )…… 두 번째 글은 예전에 홀든즈로 적고 싶어 남겨놨던 조각글로 적었습니다(마른 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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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다무. 기면.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결여된 이래 드문드문 머릿속을 포화한 문장이 있었다. 이런 날 죽어본다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질까. 잠시간 그렇게 뇌까리고서도 별다를 것이 없다는 걸 알았다. 어둠살이 내려앉은 눈그늘에 히카르도 바레타는 유리창을 외면한다. 모 꺾어 뉘인 몸은 어느샌가 관짝에 처박힌 것처럼 활동하지 않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바레타는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그 사실을 잊은 듯이 내뱉었다.

  다이무스 홀든이 살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죽어 있다. 생청붙이며 이어나가는 생각들에 결손된 논리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혓바닥 위에서 죽어버린 이파리가 된다. 히카르도 바레타가 다이무스 홀든을 원망하지 않았다 허위였으나 그 사실을 곱씹으며 홀든의 이름자를 새기는 것보다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체 눈을 가리고 끊어지는 듯한 홀든의 호흡에 연명해주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을 알았다. 다이무스 홀든은 잠들어 있었다. 그는 간헐적으로 눈을 감은 채 앞뒤로 까딱이며 햇빛을 향한 해바라기처럼 바레타에게 고갯짓했다. 영영 잠든 것은 아니었다. 아주 가끔 그는 눈을 떴고 히카르도 바레타를 응시했으며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고 물 한 잔과 부족하지 않을 만큼에 조금 못 미치는 음식을 입에 댄 뒤 다시 눈을 감았다. 처음 한두 번 이후의 이상에 바레타는 그의 어깨를 쥐었으나 병적인 기면으로부터 다이무스 홀든을 되돌리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평화롭고 순종적인 가사상태 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눈을 뜨면 마치 모든 것이 그대로라는 듯이 무릎 위 얹어진 책을 한 장 넘겼다. 너무 오랜 기간 같은 장에 짓눌려 고정되고 만 책은 엄지로 책등을 눌러펴야만 배를 드러냈다. 점점 느려지는 초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시간은 유보되어간다.

  바레타는 그런 다이무스의 발치에 꿇어 앉은 채 그의 무릎을 벴다. 애당기는 그늘이 다이무스 홀든의 목에 드리우면 입술이 말랐다. 바레타의 이빨이 다이무스 홀든의 손톱 가를 씹었다. 그리 강하지는 못한 죽은 피부는 똑하는 소리와 함께 두쪽으로 갈라졌다. 끝을 물어 벗겨낸다. 켜켜한 껍질이 까지고 손톱 밑의 여린 살이 드러났다. 살점이 함께 떨어져 나간 것인지 붉은 피부 위에서 피가 맺혔다 손톱 가의 골 새에 고인 후 느릿하게 흘렀다. 금세 수분기에 우글우글해진 검지는 시뻘겋게 젖어들어간다. 여즉 애리한 얼굴에 작은 안도가 깃든다. 살아 있는 거다. 살아 있어준 거다. 바레타의 손이 피가 낭자한 그 검지를 훔켜쥐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다이무스 홀든의 손가락을 머금는다. 손가락에선 짠내가 났고 피에선 어딘지 희석된 쇳물이 흘렀다.

  그는 가문을 살잡기 위해 살던 남자였다. 그 사실에서 제 가치를 절감하던 장남이기도 했다. 태생적으로 여섯번째 손가락 같던 히카르도 바레타는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무지한 것이 차라리 나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이무스 홀든은 바레타에게서 바레타를 찾았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들의 관계는 포폄하기에는 이성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 색사에 있어서도 단순한 언사에 있어서도 그러했다. 꺾어 움켜쥐는 것을 사랑하던 시기였다. 뿌리 잃은 남자에 욕정하던 계절이기도 했다. 비슷해지는 것도 더러워지는 것 만큼이나 쉬웠다. 다이무스 홀든의 혈관 속 증식하는 벌레는 다리가 없다. 초눈이 기는 죽음은 언제나 참도 가까웠다.




  향 언니가 준 '바레다무, 손톱을 물어뜯다' 키워드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실 새벽에 좀 손을 보고 추가적으로 붙임말을 더했어야했는데 그때 솔직히 너무 잠이 와서 정신이 없었던 것…… 사실 지금(19일 오후 12시 3분)도 잠에서 깬지 10분도 안 지났다(ㅎㅎㅎ) 요즘 참 정직한 시각에 일어나는 것 같다. 글에 논리가 없는 걸 보니 여전히 손에 붙지 않는 것 같긴 하다……


1) 다이무스가 기면증보다도 극심한 병을 앓았으면 좋겠다. 비슷한데 정말 목숨까지 깎아가며 잠에 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다 눈이 뜨이면 뭔가를 먹고 반 페이지도 읽지 못할 책장을 넘기며 자신이 현실에 있다는 것을 허벅지 꼬집듯 깨달았으면 좋겠다. 근데 그 병이 바레타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바레타는 자신이 다이무스 홀든에게 있어 기생충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을 시정할 생각은 없다. 다이무스 홀든이 죽든 말든 단기적인 행복에 현재로선 눈이 멀었다. 뒷내용을 쓴다면 바레타는 다이무스 홀든은 조금 더 끔찍하게 아끼는 내용으로 조금 다르겠지만 일단 현재로선 그렇다.


2) 다이무스 홀든은 꽃이 한 철 피고 지는 것처럼 죽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느 순간엔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멈춰 있는 시계처럼 죽어간다. 초침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해 위아래로 자주 까딱인다(그 고개처럼). 사람들은 알람이 울리지 않는 걸 자신의 수면 탓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정말로 그는 그리 외치는 법을 잊고 행동을 하나하나 할 때마다 에너지 소모가 장난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다이무스 홀든은 평생 이런 잠을 자본 기억이 없는 남자고 비록 간헐적인 기상에도 정신이 혼미하니 졸음이 쏟아지지만 이런 다디단 수면에서 깨어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에 중독되었으면 좋겠다. 기면증을 떠나 수면 중독 같은…… 몸이 고장을 위해 준비된 그런 느낌적 느낌.


3) 요는 바레다무 행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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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저다무. 수선화. 꽃갈피.

  다이무스 홀든은 자신이 그 꽃을 꺾었다는 것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모가지 꺾인 꽃은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이 그 꽃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단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젖은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자꾸만 말려 내려가는 스타킹을 끌어 올리며 벨저 또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어머니가 강박적으로 손질해온 정원을 좋아했지만 그 중에서도 정원에 앉아 시체처럼 피어있는 수선화를 더 좋아했고 그보다는 (비록 인정할 일 없었으나)그 정원 속에서 수선화를 동공에 피운 다이무스를 더 좋아했다. 벨저 홀든의 눈 속에서 피는 정원은 언제나 푸른 물에 잠겨 일렁였는데, 다이무스 홀든은 달랐다. 그의 정원은 언제나 눅눅하게 내려앉은 시대의 눈이 그득한 잿빛이었다. 약간은 거무죽죽한 빛깔의 무릎 위 얹어진 두터운 책은 사락대는 소리를 내며 넘어갔고 다이무스 홀든의 코끝에 누런 수선화가 닿았다.

  다이무스 홀든에게 처음으로 꺾인 꽃. 손바닥은 꽃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벨저 홀든은 자신이 벗어났다는 생각을 했다. 저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감정들은 더는 그를 쫓아오지 못한 채 양산형 공장의 벨트처럼 멀리 객관적인 실체를 옮겨가는 것처럼 보였다. 불구하고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웃을 수가 없었다. 그건 꼭 그들과 같았다. 똑 닮아버린 선망처럼, 다이무스 홀든은 벨저 홀든이 제게서 멀어져 가는 것을 본다. 벨저 홀든은 다이무스 홀든의 발소리가 그렇게 부서지는 것을 알았다.

  그 감정에는 가치가 없었다. 그에겐 사랑을 한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러니까, 조금은 꼬아 말해, 언제나 그렇듯이 감정은 계절 같았고 그마저도 알음알음한 학습으로 막연히 이것이 사랑인가에 대해 찻물이 식을 간극을 고민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지금보다 어렸던 때, 다이무스가 저를 까마득히 내려다 보았던 때를 떠올린다(그는 여전히 다이무스 홀든보다 작은 키였으나,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 무렵의 벨저 홀든은 변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소년의 '성장'이 아니었고 그리 달가운 징조 또한 아니 되었다. 어린 소년은 제 형의, 근육이 적당히 잡힌 종아리가 앞뒤로 움직이는 것을 뒤에서 응시했다. 일 인치 정도 잔디 위에 떠 있는 목검의 날에도 또한 시선이 갔다. 그럴 리가 없었음에도 도둑 고양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모욕스러웠다. 하지만 벨저 홀든은 다이무스의 시선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때의 감정을 잊게 된 것은 아니었다. 펼친 책 속의 꽃잎은 수분기 없이 너무도 취약해 보여서, 손가락을 대는 순간 잘게 바스라질 것이 명정했다. 그 누구도 벨저 홀든에게, 그리고 다이무스 홀든에게 이 꽃의 이름을 아느냐 묻지 않았으나 기억을 조금만 더듬어 올라가도 까칠하게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심어진 혈육의 뒤통수를 응시하던 어린 소년의 선망 어린 시선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공기가 빠져나가고 틈없이 맞붙은 두 얇은 판 속의 마른 꽃잎을 본다. 박제하기 위해 발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흔적이란 어쩔 수 없이 말단에서부터 천천히 갈빛으로 시작되었다. 밤도 낮도 안녕하지 못한 일부 속에서 벨저의 손가락이 다이무스의 손에 들린 종잇장 같은 꽃잎을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나비의 날갯장처럼 가루 난 추억과 함께 꽃갈피 또한 파스락대며 스러졌다. 꽃잎 가루가 남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다이무스의 입 속은 깔깔하게 말라 붙는다.

  이 작은 꽃 한 송이 정도는 그를 위해 괜찮아도 좋았다




  슬럼프인지 플라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쪽이든 도모지 글이 손에 잡히지 않아 트위터에서 키워드와 커플링 제시를 부탁드렸어요. 키 님, 키워드와 커플링 정말 감사합니다! (ㅠ0ㅠ ) 신경전처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걸 적고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도저도 아닌(마른 세수)


1) 개인적으로 수선화가 짓눌려 책의 해당 장에 싯누런 꽃물 자욱이 있으면 좋겠네요. 너무 불친절하게 적혔고 저 또한 제가 무어라 적고 있는지 감이 잘 안 잡힌다. 다이무스가 부지중 꽃을 꺾었으면 좋겠다. 가끔 아, 예쁘다, 라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 손이 먼저 나가는 그런…… 그래서 꽃을 꺾고 본인이 당황했으면 한다. 그걸 벨저가 꽃갈피로 만들면 좋겠다. 다이무스는 그 사실을 알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사실 적고 싶었던 건 그걸 바스라뜨리는 벨저였는데…… (우울)…… 벨저는 자신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부정하려 들었으면 좋겠다. 자존심의 문제였으면 한다. 다이무스는 그게 한편으로 안타깝고 불구하고 벨저의 마음을 받아줄 생각은 없고 여하튼 눈치게임처럼 아니면 존나 철벽남처럼 꿋꿋하게 모르는 척 했으면 좋겠다……(마른 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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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저다무. 엿새. 열나흘.

  그가 돌아온지 엿새가 된 낮이었다. 이글은 다이무스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검게 변색된 머리카락과 희게 탈색된 동공이 꼭 백조들 새로 떨어진 까마귀의 꼴 같다 탁자 위 그를 마주하며 벨저 홀든은 시게 웃었다. 상처받은 표정 하나 짓지 못한 채 다이무스 홀든은 벨저의 왼 뺨을 비켜 응시했다. 그는 두어 번 입술을 뻐끔대며 색색이는 숨을 내뱉다 이내 닫고 말았는데, 스프는 여즉 줄지 못한 채였다. 다이무스는 가끔 식탁 위를 더듬었다. 벨저는 손을 뻗어 다이무스의 스푼을 탁자 아래 숨겼다. 그러자 그는 두어 번 더 탁자 위를 더듬다 더는 손가락조차 꿈지럭대지 않게 되었다. 인형처럼 앉아 자신과는 유리된 식기의 달그락대는 소음들을 들으며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는지 벨저는 상상할 수 없었으나 썩 흥미가 있지도 않았다. 다이무스 홀든의 검은 머리카락이 도리질과 함께 천천히 흔들렸다. 그는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단 한 번도 취약하다 생각해본 기억이 없는 맏이었다. 아버지의 분에 찬 고함 소리와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아직까지도 느른히 귓구멍에 들러붙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이무스는 어땠지. 함께 울었던가. 턱을 괸 채 짓무른 방울 토마토를 포크로 찍으며 벨저 홀든은 눈을 굴렸다. 퍽, 하고 진물 같이 누런 과즙이 터져 나왔다.


  그가 침묵을 앓게된 지 열나흘이 된 밤이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였을는지 알 수 없다. 홀든 가에 돌아오기 전, 언제부터 그가 말을 하지 않게 되었는지. 벨저는 침대에 누워 제법 희극적인 상상을 했다. 이를테면 ‘그’ 다이무스 홀든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제 방으로 뛰쳐들어오는 따위의 망상이었다. 때문에 똑똑, 하는 노크 소리에 때문에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키고 말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을 밀어 열고 들어온 것은 아우다. 이글, 무슨 일이야. 짜증스럽게 내뱉은 말에는 체온이 없다. 하얀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어깨 위로 떨어졌다. 실례잖니. 이글 홀든의 한 손에 들린 허연 베개 커버는 아무렇게나 구겨져 작은 손 안에 말려 있다. 벨저는 창을 때리는 채찍비와 머나먼 곳에서 점멸하는 번개에 시선을 잠시 두었다. 저런 게 무서우니? 그럴 리가. 이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래? 번개가 쳤다. 이글의 뒤로 시커멓게 늘어진 그림자가 졌고 그는 한참을 머뭇댔다. 자고 있지 않았음에도 시간을 방해 받았다는 것에 짜증이 일어 벨저가 나가라 일갈을 한 순간에서야 이글은 용건을 얘기했는데, 정확히는 용건보다는 꼭 보고 같은 단 한 문장이었다: 다이무스가 울어. 벨저 홀든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울어? 울어. 다이무스가 운다고? 이글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몰라. 이상한 소리가 나. 방엔 안 들어가봤어. 한나를 부르는 게 나을까? 품에 그러 안고 있던 베개는 어느샌가 카펫과 마찰해 끌려 있다. ……야냐, 어린애가 아니잖아. 가서 자. ……응. 벨저의 다그침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벨저 홀든은 오래도록 이글이 사라지고 굳게 닫힌, 유려한 백합이 음각된 제 허연 방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희미한 틈으로 빗살쳐 들어오는 촛불의 일렁임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다시금 창밖을 응시한다. 여전한 폭풍우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다이무스의 억눌린 울음소리를 상상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벨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또 천천히 걸었다. 복도의 끝에 있는 다이무스의 방문 앞에 서 똑똑, 이글이 제게 그러했듯 두 번을 두드렸다. 울음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무가 우는 소리를 이글이 착각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호기심이 인 것은 사실이다. 맨질하게 닦인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문은 쉬이도 열렸다. 벨저는 고개를 내밀어 다이무스 홀든의 공간 속으로 들어섰다. 침대 위 둥글게 부푼 등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갔다. 다이무스. 움직임도 대답도 없었다. 침대로 다가가 이불을 걷어냈다. 다이무스. 하얀 이불 밑에서 젖은 눈으로 헐떡이는 제 혈육. 볼썽사나운 입술로 울음을 삼키는 저 동물. 벨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스몄다. 다이무스, 울어? 침대의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쳐 허리를 숙여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골라 떼어냈다. 수축한 동공이 정처없이 경련하고 호흡이 가빠온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다이무스는 몸을 더 곱쳐 만다. 벨저의 손가락이 잠옷 새로 드러난 골 깊은 쇄골을 더듬었다.




  새우 님이 말씀하신 유아퇴행 다이무스 보고 싶어서 쓰다가 잘 생각해보니 이거 빼박 이다벨인데 빵을 나눠먹는 형제애를 시전하기에는 우리 애기들이 너무 어린 것 같아서…… (^-^ )…… 오……


1) 안타리우스에 납치 되어서 머리카락은 검게 물들고 언어와 시력을 잃은 어린 다이무스가 보고 싶다. 벨저가 그걸 짓누르고 억압하는 게 무척 보고 싶은데…… 정신적 충격으로 퇴행하면 제가 참 좋아합니다…… 근데 사실 다이무스는 퇴행을 한다 쳐도 되게 조숙할 것 같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타인의 손을 기다려야하는 그 상황 자체가 다이무스를 무력하게 보이게 만들어서 제법 좋아한다.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순수한 모습이 보고 싶다.


2) 다이무스 홀든이 다이무스 홀든이 아니게 된지 스무아흐레가 지난 새벽이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눈을 떴다. 눈을 감았다. 세상은 한결 같이 시끄러웠다. 참도 오래 앓아 혓바닥을 움직여 법을 점차적으로 잊어가고 있었다. 홀든 가의 믿음직스러운 첫째였으나 동시에 너무도 어린 겨울이었다. 척추에 꽂힌 바늘에서 투명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울혈로 얼룩진 몸뚱어리는 축하게 시들어 빠져 더는 삼켜내던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3) 사족을 덧붙이자면 다이무스는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탁자 위를 더듬어 스푼을 쥐려고 했던 건데 벨저가 기민하게 엿먹이려고 스푼을 숨긴, 그런… 아마 스푼을 쥐었어도 스프를 떠먹지는 않았을 것 같다. 흘리는 게 혐오스러워서. 아마 엄청난 연습 끝에 가족과 같은 탁자에 앉는 상상을 하지 않을까, 다이무스라면. 한나는 저 날 이후 다이무스에겐 스프를 주지 않았다. 다이무스도 함께 식사를 하려 하지 않았고. 안타리우스에서 돌아온 이후 초반엔 괜찮았지만 점점 퇴행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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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다무벨저. 온실.

  이상스럽게 뜨순 볕이었다. 유리를 투과해 들어온 양광에 좁은 유리정원은 후텁하게 달아올랐다. 함뿍 젖어버린 천이 등 언저리서 들러붙어 쉰내가 유난했다. 이글 홀든은 그렇게 눈을 떴다. 부시었다. 무지갯빛으로 산산조각 나 무엇인가 그의 시야 속으로 파스스 떨어졌다. 꼭 유리만 같아 눈을 질끈 감았으나 얼굴에 닿아오는 것은 없었다. 거짓말 같은 햇빛이다. 두 팔로 바닥을 짚은 채 이글은 몸을 일으켰다.  대리석으로 짜인 바닥 위 손가락을 문대자 허옇던 김이 묻어난다. 질끈 올려 묶었던 머리카락이 한동안 누워 있었던 탓인지 느슨히 목덜미 께로 내려와 있었다. 한나의 빗질은 퍽 포근하다.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저택으로 돌아가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검지 손가락을 걸어 머리끈을 풀어내자 머리카락이 사락사락 떨어졌다. 퍽퍽하게 더운 숨 탓인지 금세 뒷덜미와 뺨에 척척히 가닥 져 들러붙는다. 채 녹이지도 삼키지도 못한 채 입 속에 담아둔 사탕이 여즉 도록도록 구르고 구부정하게 수그린 등에 그늘이 졌다. 손가락만으로는 더는 꼽을 수 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노닐었으나 이글 홀든은 그 중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아직도……

  그러고 있을까.

  눈을 굴린다. 한심하다는 생각은 했다.

  흰눈을 떠 덩쿨이 감긴 온실의 입구를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다이무스 홀든이 저 문을 열고 그를 향해 구둣굽을 또각이며 걸어들어올 것만 같았다. 혹은 벨저 홀든이 크라바트를 매만지며 자신을 다그치고 화를 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리 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다이무스 홀든이라면 시간을 고를 것이고 벨저 홀든이라면 이글 홀든에게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마주한 푸른 눈에 서린 고양감에, 인정한다, 이글 홀든은 한 호흡 간 벨저 홀든의 죽음을 상상했다. 그의 멱살을 쥐어 사냥하기를 바랐다. 다이무스 홀든은 소리가 없었다. 꺾인 꽃의 성대는 거세되었다. 이글은 온전하고 기적적으로 홀로가 되었다. 도태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건 너무 거창했다. 그런 치레를 통해 진정 '도태'될 자신을 원치 않았다.

  그는 유화처럼 찐득하고 이후엔 굳어져 거칠게 뺨에 와닿는 꿈을 꾸었다. 졸음이 부옇게 그의 망막을 훑어올렸다. 데구르르 굴러 온실의 구석에 처박혔다. 손바닥을 짓누르자 뜨끈한 유리에는 김이 서렸다. 호 하고 온기를 불어넣으면 천천히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의 기억도 그랬다. 목소리를 잃은 단편적인 벗은 등과 흔들리는 다리가 떠올랐다. 곱쳐진 발가락과 뒷덜미를 거머쥔, 굳은살이 박힌 커다랗던 손도 그곳에 있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굴어도 몇 번이고 침대의 프레임은 계집애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이글은 천천히 가열된 유리 위로 뺨을 댄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입술을 내리 누른다. 벗겨진 입술이 시큰하게 쓰려온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며 이마를 찧었다. 속눈썹은 유리와 함께 느릿하니 녹아내린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뻐끔댄다. 쩌억쩌억하고, 눈을 끔벅이고 입을 다실 때마다 그런 소리가 났다. 구르며 입 속으로 들어찬 머리카락들을 질겅이며 씹어댔다. 침으로 범벅이 되어 엉긴 것이, 한나에게 좋은 소리를 들을 순 없을 성 싶었다. 

  벨저의 옆모습이 꼭 이랬다. 땀에 엉겨, 찰랑이던 가닥은 뭉쳐 빳빳한 기색을 비친 채. 그는 자신의 혈육을 범하며 몇 번이고 거슬리기 짝이 없다는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다이무스의 얼굴 위로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허벅지를 그러쥔 손에 등이 아린 것인지 다이무스는 더욱 앓았다. 정말로 그는 아파보였다. 그리고 그 표정은 낮은 시선에 참도 바다 같았다. 오스트리아는 내륙이었고 이글 홀든에게는 손에 쥐고 놀 수 있는 것들이 충분했기에 그는 그 짠내가 흐르는 물에 얼굴을 담근 적이 없었으나, 꼭 바다 같은 감정이었다. 이글의 생각은 거기서 잠시 끊어졌다. 그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해초나 물고기 따위가 있을 것이다. 가끔은 죽은 사람이 떠다닐 거고 고래가 물을 뿜은 뒤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터다.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억울했고 때문에 더욱 심해에 가깝다.

  "모르는 척 해줄게."

  그리고 그가 그곳에 놓여져 있었다. 다그치기 위한 오브제처럼 혹은 장난질 이후 뛰어들어온 부엌의 탁자 위 과자 한 바구니처럼. 그는 오랫동안 가만했다. 가니메데스의 분수 물줄기를 하나 건너 그를 마주한 이글은, 버겁게 숨을 내뱉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데굴 굴렀다. 그의 손이 한 움큼 홀든의 이름자를 쥐어 마른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짜증스러운 얼굴이었다. 퍽퍽했다. 그는 얼마나 이글을 찾아다녔을까. 과연 헤매기는 했을까. 적당히 기른 머리카락이 젖어 가라앉았고 우글우글하게 지문에는 주름이 졌다. 자신이 얼마나 이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는 아무 것(식물은 볼썽사납게도 취급되지 못했다)도 없다. 탓에 익숙해졌던 온실의 풀비린내 틈사구니로 상쾌한 파우더내가 섞였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마지막이야."

  이글은 내뱉었다. 이글 홀든은 엄지와 검지로 작은 틈을 만들었다. 벨저의 작은 머리통은 좁은 시야 속에서 그 새에 딱 알맞게 들어찼다. 똑, 하고 비틀면 뚝, 하고 뽑혀나올 것처럼. 무심하게 이어지는 아우의 목소리에 벨저는 잘게 웃었다. 그는 침대 위 여즉 할딱대고 있을 다이무스 홀든을 떠올렸다. 그는 지독하게 행위를 염오했으나 동시에 일탈에 탐닉했다. 시트 아래 종잇장을 깔아 정액이 시트에 스미는 것을 막을 만큼 꼼꼼했으나 동시에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다이무스 홀든과 제가 씹질을 그만두는 일은, 당분간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돌하기 그지없지. 어쩜 이렇게 커버렸는지.

  "그건 협박이니, 이글?"

  졸졸졸. 잔뜩 날을 세워 제게 다가오는 것들에 민감했던 이글은 마침내 분수의 소리를 들었다. 분명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는데, 분명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알아 차리는 것은 지독히도 늦었다. 이글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금전까지의 상냥함을 거짓으로 치부하는 괴괴한 긴장이 감돌았다. 협박이 아냐. 그는 침묵으로 그렇게 답했다. 경고지. 벨저의 눈이 곱게 접혀 사라졌다. 저런. 유감스럽기 짝이 없다는 어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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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다무. 정사.

  바레타의 팔이 젖은 홀든 그러 안는다. 깍지를 낀 손이 풀려 셔츠 위 도드라진 척추를 쓰다듬고 골반을 더듬었다. 이 모든 향에 도취되어 천천히 바레타의 입술을 물었다. 부패해 절단해낸 그의 새끼지의 한 마디가 자라지 않은 지 두어 주가 흘렀다. 그리고 그의 두 발이 뭉그러져 제 꼴을 하지 못하게 된 지 서너 일이 지났다. 다이무스 홀든은 애써 그의 상처들을 응시하지 않으려 애썼다. 바레타는 특별히 그 사실에 대해 비참해 하거나 자괴하는 일 없이 일상을 이어갔다. 차이보다는, 서로의 준비라는 것이 옳은 표현이다. 가까운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 애써 연명하는 것에 있어 바레타는 진즉 회의적이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고 계제적으로(결과적으로는), 죽을 것이다. 세상은 바꾸기 힘든 사실과 바뀌지 않는 사실: 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차라리 단순해 쉬운 이치다.
  바레타가 홀든이 더는 자신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인지한지는 퍽 오랜 시간이 흘렀다. 불구하고 바레타가 다시 한 번 그 부탁을 내뱉지 못했던 것은 사날없던 홀든의 곪은 시선, 그리고 고저없으나 전후로 요동치는 그들 새의 기류 탓이기도 했다. 바레타의 어깨 너머, 개먹은 의자의 가죽은 허옇게 일어나 있다. 홀든은 습기가 찬 제 뒷목을 떠올린다. 바레타는 한숨을 내쉬며 어깨의 힘을 풀곤 홀든의 목덜미에 더욱 고개를 묻었다. 투미한 애새끼처럼 이빨을 새워 몇 번이고 잘근대던 그는 마침내 한 입을 베어 물었다. 소루한 애무에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겼던 살갗이 찢겨 나간다. 삼키고 삼켜 어느 순간부턴가 응어리가 되어버린 단어가 홀든의 피와 함께 바레타의 밖으로 튀어 나왔다.
  "다이무스."
  분명 바로 자신의 곁에서 속삭여진 이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홀든은 그것이 도모지 저의 이름 같지가 못하다. 꼭, 묵음처럼, 죽어버려 혓바닥 위에서 녹아 사라진 양.
  "날 죽여다오."
  아.
  다이무스 홀든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는 희게 물들어 가는, 바레타의 등에 얹어진 자신의 두 손을 응시한다.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 끝으로 물방울이 뚝뚝 방울져 흘러내렸다. 히카르도 바레타는 홀든의 손 안에서 가라앉는다. 사랑했으나, 오간 것은 돌려 받지 못할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솔아버린 상처 아래 갖힌 진물처럼 다이무스 홀든은 여전히 미동없다. 그의 눈 속에 바레타는 없다. 나를, 죽여다오. 바레타는 혹 그가 듣지 못한 것이 걱정된다는 듯 다시 한 번 내뱉는다. 다이무스 홀든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바레타를 바라본다. 회백질을 닮은 시선이 인중을 콧대를 타고 올라가 눈을 마주한다. 바레타의 옷깃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얇은 천 아래의 살갗에 손톱을 제겼으나 단정히 깎인 손톱으로는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바레타의 등에서부터 하나둘 떨어져 나갔다. 바레타의 입가에는 알짝지근한 미소가 걸린다.
  "죽여다오."
  그는 한 번 더, 이번에는 자신의 핏물과 함께 내뱉었다. 죽여다오. 죽여줘. 홀든, 다이무스 홀든. 나를…… 나를 죽여다오. 홀든의 어깨에 딱딱하게 힘이 들어갔다. 바레타는 얇은 살갗을 찢고 장기를 해치는 태도에 허허로이 웃었다. 파아, 하고 날숨을 뱉으며 키들대면 입술과 코에서 피가 울컥 터져나왔다. 날은 점점 더 앞으로 밀려난다. 깊숙하게, 그들의 가장 밑바닥까지. 히카르도 바레타는 희미한 미소와 함께 앞으로 서서히 무너진다. 그러나, 이내, 그의 얼굴은 푸르게 얼어간다. 뜨끈한 것이 맞댄 뺨 새로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돌렸고, 눈을 감은 채 입을 다문 다이무스 홀든을 좁은 시야 너머로 응시한다. 태도의 자루로부터 떨어져내린 다이무스 홀든의 손이 대롱대롱 허공에서 흔들렸다. 그는 눈을 뜬 채 자신을 응시하는 처연한 연인을 본다.
  "홀든."
  바레타는 제 등 뒤로 손을 뻗어 검자루를 쥔다. 짓누른다. 흉곽 속 살아 숨쉬던 구더래기들을 짓이긴 날이 다이무스 홀든의 등짝을 마저 꿰뚫었다. 홀든. 그는 이상의 단어들을 떠올릴 수 없었다. 함몰되어가는 안방 너머서도 붉은 기운이 몰려왔다. 바레타는 고개를 비틀어 다이무스의 뺨을 쥐었고, 뜨인 그의 눈을 마주하며 혓바닥으로 홀든의 입술을 두드렸다. 쉬이 열린 입술 새로, 차마 삼키지 못한 뜨끈한 피가 끊임없이 주르르 쏟아진다. 바레타는 그 위로 자신을 겹쳤다. 검붉은 접문. 여즉 홀든의 뜬 눈을 감기지 못한 채였다.

 

 

 

심중정사. 동반자살. 믹향 님의 (8-8 ) 같은 검으로 자살하는 다이무스와 바레타 썰에 신나게 죽으며 썼습니다. 곱고 예쁜 썰 풀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믹향 님. 믹향 님 금썰 동네방네 소문 내고 싶은데 제가 말재주가 없다…… 믹향 님~! 사랑해요~! 이거 적는다고 한국 시각 기준 오후 10시까지 다 못 적으면 까까 보내겠다고 했는데 어찌저찌 적었네요(방방)

 

1) 바레타를 관통한 다이무스의 검이 천천히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어 다이무스의 흉곽을 부수고 바레타는 이미 죽어버린 다이무스에도 불구하고 손을 뻗어 기어이 검을 관통시키는 게 보고 싶었는데 뭘 적었는지 모르겠다. 다이무스가 죽는 순간 끝까지 입술을 벌리지 않았는데 바레타가 죽은 다이무스에게 키스하기 위해 입술을 맞대고 혀로 헤집으면 그 순간 입 속에 고여 있던 피가 주르륵하고 끊임없이 쏟아졌으면 좋겠다. 바레타도 서서히 죽어가겠지…… 뭔가 말이 줄줄줄 이어지는데 어감이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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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무스. 제노사이드.

  샬럿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저를 감싸고 있던 물방울 건드렸다. 손가락 끝이 맞닿은 부분부터 부서지듯 허물어져 내린 수벽은 이내 그녀의 발밑 웅덩이가 되어 사라졌다. 안개 속, 그녀는 버려졌다. 정확히는 스스로를 유기한 것이다. 어린 몸뚱어리를 찢으려 든 얼음 결정은 이제 녹아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샬럿은 숨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신체의 핏물이 출렁인 듯 균형이 잡아지지 않았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쏟아내린 빗물이 우비 자락 새로 자꾸만 스미었다. 겹겹이 옷을 껴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빨이 따그닥 부딪칠 정도로 공기가 시렸다. 먼 곳에서 포탑이 탄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철거반 노동자들의 단말마가 희석된다.
  명정하게도, 이곳은 아비규환이었다.
  샬럿은 제 목을 더듬었다. 오돌토돌하고 얼룩덜룩하게 변했을 것이 뻔했다.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자 폐부가 떨려오며 밭은 기침이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흐르는 끈끈한 눈물을 우비 아래 옷소매에 문질러 닦았다. 다이무스 아저씨는? 아저씨는 어떻게 됐지? 아저씨는? 나는? 난 어떡해야 좋아? 죄였던 목에 쿨럭이며 기침을 토해내고서야 그가 떠올랐다. 분명, 내동댕이 쳐지고 살갗을 찢기던 순간 두렵던 이들의 사이로 빛나던 검은 다이무스 홀든의 것이었다. 도망쳐라. 핏기 없이 허연 입술이 뻐끔댔고 샬럿은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그 누구도 자신을 찾을 수 없도록 자신이 살아 남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물이 찰랑찰랑 들어찬 장화를 질퍽이며 눈을 감은 채 달렸다.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기 위해 튀어나간 손이 그녀의 우비 모자를 스쳤고 척추를 타고 흐르는 공포는 안구 뒤편까지 다달아 그녀의 숨을 죄였다. 검이 맞부딪히며 쨍강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등 뒤에서 이어졌다. 그녀는 다리에 더욱 힘을 주었다. 푸른 머리카락이 울고 있었다. 그러자 더는 누구도 그녀를 쫓지 않게 되었다. 다이무스 홀든을 죽여 취하는 이득이 그녀를 죽여 취할 수 있는 것들에 견줄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샬럿은 몸을 일으켰다. 망설임은 없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어딘가 거세게 부딪혔던 것인지 머리 한쪽이 쎄하게 아려왔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리 있을 수는 없었다. 만약…… 만약 다이무스 홀든이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자신이 비를 뿌려 아군들이 그를 구하러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살아, 있다면.
  주머니 속에 짤랑짤랑 든 주화들을 샬럿은 안개 속으로 던졌다. 들이붓다시피 한 스프린터에 목구멍이 쓰라렸다. 마지막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그를 도울 수 없다. 샬럿은 작은 보폭으로 건너편, 다이무스 홀든이 있을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퉁이 너머서 숨 죽여 들려오는 소리들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바람이 불면 빈 파이프들이 연주하듯 울었는데, 그 소리를 무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너무 가까이 다가와 쿠션을 켜기도 여의치 못한 상황이었다. 샬럿은 느릿하게 상자 새로 몸을 숨기며 걸음을 옮겼다.
  안개 사이로 어슴한 사내의 윤곽이 눈에 들어왔다. 거친 호흡이 들려왔다. 코로 공기를 가쁘게 들이마시는 소리와 거칠게 입술 새로 목구멍을 긁고 튀어 나오는 날숨은 꼭 조각칼과 같아서, 다이무스 홀든의 폐부 가장 깊숙한 곳에 생채기를 냈다. 피구름은 검날 끝에서 피안화처럼 피어 올랐다. 시선 아래 하얀 손톱 밑이 검게 변해갔고 흙바닥이 초콜릿처럼 녹아 녹진하게만 변해간다. 안개 밖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샬럿은 하얗게 굳어졌다. 뭔가 물컹이는 것을 밟은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내려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후끈한 비린내가 콧속으로 달려들었다.
  "다이무스 아저씨."
  몇 번이고 불결한 체액을 뒤집어 써도 그의 태도는 언제나 결벽하게 빛났다. 털어내는 순간 흩뿌려지는 핏물이 그의 까칠한 뺨에 점점이 안착한다. 그는 그것을 자신의 손가락으로 훑어내 고양이의 그것 같은 혀 끝을 대어본다. 녹 슨 못에서나 날 법한 냄새가 났다. 붉은 눈에서 여지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분수처럼 퐁퐁 솟아나오던 눈물은 이내 속에 쌓인 모든 것을 토해내듯 더욱 거세졌다. 다이무스를 바라본 샬럿은 마침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장화 아래 짓눌린 물체를 확인했다. 손톱이 단정하게 손질된 팔 하나. 그녀의 뺨이 위액으로 둥글게 부풀었다.
  "다이무스 아저씨."
  보글보글하고 거품이 이는 소리에 다이무스는 검을 든다. 그리고 그 순간, 팡, 하고 기중을 떠돌던 빗물이 다이무스의 위로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그는 어째서 네가 그곳에 있냐는 듯 검을 거두어들였고 천천히 샬럿을 향해 다가갔다. 그녀는 제가 만들어낸 구름 속에서 서럽게만 울고 있었다. 이 광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울어야하는 이유는 없었다. 사방에 낭자한 도축된 고깃덩이들을 발로 밀어 길을 냈다. 그는 한 때 포탑이 자리했던 흔적만이 남은 길을 걸어 돌아가고 있었다. 샬럿의 손은 제 옷깃을 쥔 채 하염없이 나겁하게 질려 있다. 그를 따라 걷지 못한 채 자꾸만 고장난 인형처럼 그를 불렀다. 
  "다이무스 아저씨."
  "돌아가지, 샬럿."
  다이무스는 다그치듯 그녀에게 속살댔으나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다이무스 아저씨, 다이무스 아저씨. 자꾸만 이어지는 호명에 마침내 다이무스가 보폭을 줄이며 뒤돌았다. 샬럿은 다이무스의 광대뼈와 입술과 그 눈을 훑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는 양 눈을 빠른 속도로 깜박이는 샬럿에 다이무스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샬럿. 그 순간 아이의 입술이 톡하고 터져올랐다. 왜, 왜 웃고 있어요? 짓뭉개진 발음 탓에 그 말을 알아 듣는 것이 쉽지 않았다. 왜, 다이무스 아저씨, 왜 그렇게 웃고 있어요? 그 자리에 다이무스는 멈춰선다. 그는 샬럿의 시선을 따라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자신의 입꼬리를 더듬었다. 신경이 죽은 듯, 그러나 전혀 어색하지 않게 비틀린 핏물을 핥아내는 혓바닥이, 손가락 끝에서 멈춰 있었다.

 

 

 

1) 만렙 다이무스가 방밸샬 구하러 가서 5전광 띄우고 쪼개고 돌아오는 글입니다. 여러분, 사이퍼즈 펜타킬 코멘트가 '제노사이드'라고 합니다. 미친 떡밥입니다. 알려주신 담장 님 감사합니다. 제가 쌈바를 추다가 운명할 것 같습니다. 전장의 화신과 미쳐 날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분입니다. 제노사이드래. 미친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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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피다무. 이십일 호.

http://averhaign.tistory.com/34

제피다무. 죽음. 블레이드. 이어지는 글.




  제피로스가 사라졌다. 어느 순간엔가 끊긴 추적 전파는 상황을 더욱 모호한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큰 문제는 아니었으나 결코 작은 문제 또한 될 수 없었다. 제피가 사라진 것과 제피의 내부 잔존할 시청각 자료가 사라진 것.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 알 수 없는 전쟁 중 그들의 무기는 육탄에 그치지 않았다. 우선적으로 취급되는 것은, ‘정보’였다.

  제피가 사라진 것은 전투 중의 일이었다. 그나마 제피가 따르던 것은 회사의 물꼬맹이들(그녀들에 호의적이었던 것뿐이었다)이었고 그녀들은 기껏해야 후방 전선을 전담해 ‘어른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그랬던 그녀들이 제피에 시선을 둘 수 있었을 리가 만무했고 애초 네비게이터란 지침하기 위한 것이지 부가적인 짐이 되기 위해 대동하는 것이 아니다. 고로, 사실 상 이후의 행방을 추적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되었다.

  물론 이딴 네비게이터의 여분이라 함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무척, 그들에겐 곤란한 일이겠지. 하얀 면장갑 아래 식어빠신 손이 약간은 거칠게 일어난 제피의 표면 위를 오갔다. 삐빅대는 소리가 끔벅끔벅 이어졌다. 어두운 지하에선 자가적으로 충전하는 것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하얀 가운을 걸친 사내는 몇 번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공만한 제피를 퉁퉁 무릎 위서 튕겨 보다 의자 너머로 시선을 돌려 묵묵히 미동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에게 제피를 던진다. 훅하고 묵직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이봐, 이십일 호."

  제피를 받아든 이십일 호의 허리가 그 무게에 일순 크게 흔들린다. 불구하고 여전히 표정없이 입술을 열지 않는다. 손아귀에서 펜을 굴리던 사내는 낄낄대며 천착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씨팔, 대답 좀 해봐. 쫄려 뒤지겠으니까. 그 말에 그제서야 이십일 호로부터 네,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정말 모체처럼 아가리가 무겁네. 재미없다. 하루이틀도 아닌데 저런 게 스물하나나 넘어 있다니, 흥미롭지만 악취미적이었다. 연구원이 된 지 10년이다. 여전히 재미있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네가 붙여 왔으면 그거 데려 나가서 햇빛 좀 쬐어줘라. 쨍알쨍알 존나 말도 많던 게 삘릴리하게 닥치고 있네. 전력 부족이야. 회사든 연합이든 구역 전력을 일반 가정집 수준으로 맞춰놨어. 어디 우리 땅속 벌레들 서러워서 살겠나. 저딴 축구공 먹여 살릴 전력은 없어."

  책상 앞의 의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마치 벌레를 쫓아내듯 어서 꺼져버리라는 듯한 사내의 손짓에 이십일 호는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오른발, 왼발을 내딛으며 천천히 티미한 불이 밝혀진 복도를 걸어 기지의 밖으로 걸어나간다. 모든 것을 엄폐하듯 개미집처럼 깊숙하게 지어진 기지는 축축한 공기가 그득했다. 검을 효율적으로 휘두르기엔 경미하나 썩 이롭지 못한 환경이다.

  그의 두 팔 안에서 끼긱대는 소음은 계속해 이어졌다. 이십일 호는 벙커를 열어 주변을 살펴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새벽 어스름이 뉘엿한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여전히 둥그런 제피를 안고 있었다. 해는 뵈지 않았고, 그는 햇빛을 쐬여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천천히 야트막한 언덕 위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걸터 앉았다. 이십일 호는,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릴 셈평이었다.

  "……제피 일어났어! 혼내지 마! 제피 안 졸았어!"

  그러나 몇 분이 흐르자 날개를 퍼덕대며 그 구체는 돌연 벌떡 튀어올랐다. 이십일 호는 손을 뻗어 공중을 날아다니는 그것의 안테나를 낚아채 거머쥐었다. 제피 아파! 제피 아파! 그는 한참을 액정 위에서 번뜩대는 기묘한 문자들을 응시했다. 불명. 그의 얄상한 입술 새로 한 단어가 스며 나왔다. 불명. 제피는 좌우로 본체를 흔들며 가까스레 이십일 호의 손아귀를 빠져나온다. 적의적인 물체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한 것인지, 혹은 기기로부터의 적의는 알지 못하는 것인지 이십일 호는 다시 한 번 그것을 낚아채기 위해 든 손을 갈무리했다. 제피의 액정에 놀랍다는(듯한) 표정이 떠오른다. 이내 그것은 천천히 이십일 호의 곁을 맴돌았다.

  "어? 블레이드! 블레이드, 안녕!"

  이십일 호의 써늘한 시선이 제피의 액정에 닿았다. 블레이드, 안녕! 제피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인사를 하면 안녕! 하고 대답해야하는 거야. 블레이드, 안녕! ……안녕.




좀 마음에 안 드는데 어떻게 기력이 없다…… 사이퍼즈 하고 싶다…… 제피다무 다른 분들이 연성해주신 거 보고 싶다(울먹)


1) 역시 제피가 클론 다이무스를 만났으면 한다. 그러다가 전투 이후 애가 사라졌으면 좋겠다. 신체 정보가 다이무스를 일치하다 보니 아이가 과자 보고 쫄래쫄래 따라가듯 생존한 클론에 붙어 안타리우스로 따라갔으면(ㅋㅋㅋㅋ) 일단, 안타리우스 축에서는 되게 당혹스럽지 않을까. 이건 마치 물놀이 보냈더니 애가 남의 집 튜브나 자동차 키를 가져온 그런 기분(ㅋㅋㅋㅋ) 더군다나 제피가 어떤 원리인지도 모호할테고. 일단은 폐기보다는 투철한 실험 정신으로 제피를 분해할 것 같다. 제피의 코어를 이식하는 거(중요) 사실 이게 보고 싶었다(머슥) 개인적으로 제피는 역시 피터 또래의 소년 같은데 다 커도 괜찮을 것 같다. 덩치 커다란 청년이 클론 다이무스에게 붙어서 뺨 비비고 뽀뽀해달라고 난리치면 (나만)존씹귀모에사할 듯.


2) 제피가 정말로 다이무스가 다이무스가 아니라는 걸 몰랐으면 한다. 얘는 뽀뽀해달라는 말에 뽀뽀해주고 후퇴하자고 할 때 다이무스가 후퇴해주니까 그 상황이 너무 기쁘고 뿌듯하고 다행스러운 거야. 제피는 메커니즘 속에서 최선의 선택이 무엇인지 알고 있거든. 얜 그냥 다이무스가 안 죽었으면 하는 거. 그걸로 만족하는.


3) 그러던 어느날 눈앞에서 이글 같이 다이무스를 망설임없이 벨 수 있는 누군가에 의해 제피가 쫓아다니던 클론 다이무스 모가지가 댕겅했으면 좋겠다. 제피는 공황 상태에 빠진다. 믿을 수 없어서. 그때부터 제피의 어딘가가 어그러졌으면 좋겠다. 한 명의 다이무스 클론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이 클론이 죽고 나서 새로운 대상을 탐색하려 시야를 넓히자 온 세상에 다이무스가 있는 거야. 근데 회사든 연합이든 다들 다이무스를 다양한 방법으로 살해해. 온 세상에 제피의 적으로 보였으면 좋겠다. 온 세상. 하물며 죽어버린 능력자들의 시체들까지도. 일단 클로닝이라는 기술 자체가 미완성적인 거라 전투 중 폭사하거나 장기를 토해내는 다이무스도 있을텐데 제피는 그게 너무 분하고 서러웠으면 좋겠다. 안타리우스 측은 이게 반가움과 동시에 무척이나 곤란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그들에게는 제피의 핵심적인 인격을 건드릴 수 있는 기술이 없을테고(제피를 쪼대로 컨트롤할 수 없을테고) 불구하고 제피는 안타리우스(의 다이무스의 클론)에게 호의적일 거라는 거. 안타리우스 측의 누군가가 제피를 아주 살살 꼬드겼으면 좋겠다. 제피의 인식은 꼭 아기오리 같아서, 새로운 대상에 자꾸만 각인되는 건데 이게 다이무스에 한정되게 '오류'가 난 거였으면 한다.


4) 안타리우스 측에서 클론을 대량생산할 때 다이무스 본인을 잡아둘 수 없으니 유전자를 얻은 후 지속적으로 취하기 위해 다시 모체가 될 수 있는 클론을 하나 더 만들었을텐데(가장 오래된) 거기에 제피를 붙여두었으면 좋겠다. 적다보니 제피가 존나 케르베로스 같군(ㅋㅋㅋㅋ) 여하튼 이 클론은 다이무스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먼 옛날 다이무스가 안타리우스에 납치되거나 안타리우스와 전투를 했을 적까지의 기억만 가지고 있으면 한다. 여전히 기계적이고 감정은 없다. 근데 제피에겐 단편적이나마 기억을 공유할 수 있는 다이무스가 생긴 거잖아. 비극임과 동시에 축복이다. 그러던 중 거대한 전투가 일어나 안타리우스의 아지트의 주축이 흔들릴 수 있을 정도의 소탕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클론들이 안전할 수 없을 정도의. 결론적으로 안타리우스 소풍 갔다가 발목 잡힌 제피 멘붕물… (^-^ )… 뒤는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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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새다무. 같이. (ㅋㅋㅋㅋ).

  가끔 이렇게 멍청하게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보내다보면, 아, 저 사람도 사람이구나 하고 막연하게나마 느끼게 될 때가 있다. 가령 과거, 한때의 우상이었던 가수가 치명적인 스캔들에 휘말린다거나 화장실 칸에서 걸어나오던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깜박 잊고 물을 내리지 않았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는데, 지금의 경우는, 전등 갓 속의 죽은 벌레 두어 마리였다. 꽁새는 소파 위 무릎을 그러 안은 채 하염없이 천장의 무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점차적으로 시선을 내려 엎어진 액자, 알 수 없는 기준으로 분류된 책등을 훑다 제 맨발 아래의 가죽 소파, 그 밑의 슬리퍼, 그 아래의 카펫의 감촉을 막연히 상상했다. 분명히 어려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등으로 고개를 돌리는 일이 참도 어려웠다. 그는 어머니와 같이 않아서 뒤통수에 눈이 달려 있거나 하는 일은 없을텐데. 단순히 기분을 위해 걸친 하늘하늘한 시폰이 손가락 새에서 물컹하게 주름졌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같은 말들이 빙글빙글 얼어붙은 채 돌고 있었다.

  저기요.

  있잖아요.

  아, 근데(마치 이제서야 떠올랐다는 듯).

  이름 없이도 그를 부를 수 있는 말들은 그녀의 모국어로 셀 수 없이 많았다. 문제는 저 잘난 인간이 한국어를 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었다. 꽁새는 한참을 생각했다. 실례합니다Excuse me?(그녀는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하고 내뱉는 자신을 상상했다) 이건 너무 거절의 여지가 많다. 헤이Hey? 이건 뒷말을 내뱉기도 전에 겁에 질린 타조처럼 꽁새 자신이 먼저 소파의 쿠션에 머리를 파묻고 다이무스는 경멸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볼테고 그녀의 연애 라인은 망하고 그녀의 가정이 망하고 사회가 망하고 국가가 망하고 지구가 멸망할 게 불보듯 뻔하다.

  개방된 부엌에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거셌다. 설거지를 하겠다 나선 것을 '접시가 걱정스럽다'는 말로 제지한 다이무스 홀든은 저게 익숙한 모양이지. 페티큐어를 바른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초를 세고 있자니 점점 더 자신이 없어졌다. 애초 어쩌다 자신이 이곳에 멍청히 들어앉아 가구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인지 기억해낼 수조차 없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가방 속에는 그녀를 꼭 닮은 지갑이 있었는데, 모든 원인은 그 속의 작은 종이쪼가리 두 장에 있었다. 하지만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이무스 홀든의 곁을 돌다 찾아온 것도 그녀였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녀였다. 그녀는 홀든이 저를 집에 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녀가 의기소침해진 것을 제하면, 사실 상황은 그럭저럭 괜찮게 돌아가고는 있었다. 

  "다이무스."

  꽁새는 천천히 다이무스 홀든의 앞에서 내뱉을 말을 조용히 연습했다. 같이…… 영화 보러 갈래요? 한 장 남았는데. 거절은 거절합니다. 입에 올리자 더욱 낯간지러워지는 말이었다. 그리고 면구함에 두 손에 고개를 파묻자,

  "영화?"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가 그녀를 향해 점점 다가온다. 아, 씨발, 미친, 들었어? 어디부터 들었대? 이름부터? 아니, 근데, 언제 설거지 끝났어요? 결코 가볍지 못한 공황 상태에 빠져 소파 위서 한참을 오뚜기가 되어 있던 꽁새는 황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에 빠진 양 팔을 허우적댔다. 그러자 곁으로 다가온 다이무스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바로한다. 딱히 수줍거나 하는 감정보다도, 쪽이 팔린다는 생각이 먼저였다. 애초 그녀는 그리 수줍은 사람이 아니…… 지는 않았다.

  다이무스 홀든은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꽁새는 천천히 굳어진다. 썩 좋은 조짐은 아니다 뭐, 급한 있음 말고요. 거절 당하는 것에 어그러질 수 있는 분위기가 그리 달갑지 못해 '급한 일'이라는 변명을 애써 덧붙인 꽁새는 가방을 챙겨 든다. 그녀는 홀든은 지나쳐 철 지난, 납닥한 봄 구두에 허리 숙여 발을 꿰었다. 괜히 싱숭생숭하게 제가 제 속을 들쑤신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뱃속에 밀어넣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과일에 체할 것 같았다. 한참을 구두의 뒤축에 검지를 밀어 넣어 뒤척이다 마침내 고개를 들어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위로 먹먹한 검은 그림자가 진다.

  "……거절은 거절한다고 본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문고리를 잡은 꽁새의 손 위 다이무스 홀든의 손이 닿았다. 꽁새는 잠시간 꼼지락대다, 이내 문을 밀어 열었다. 화창하다. 토박을 약올리기 좋은 날이었다.





http://lastpolka.tistory.com/27

여러분 이거 읽고 오세요. 어서 읽으시고 요한다무라는 돌아오실 수 없는 강을 건너십시오. 


1) 난 솔직히 꽁새 님이 진짜로 요한다무 뒤편 써주실 줄은 몰랐다. 매우 놀라웠다. 그리고 내가 꽁새다무를 생각보다 막힘없이 적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버렸다. 꽁새 님이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했는데 '1장 남았다'는 말에 다이무스가 영화관 가서 자기 분 결제하면 좋겠다. 꽁새 님이 막 놀라서 '헐, 아뇨, 그, 다이무스, 왜 돈 내요?'하고 당혹스러워하면 다이무스가 '한 장 남았다고 하지 않았나'라고 대답했으면. 둘 다 어버버했으면 좋겠군. 한쪽은 말이 방방 떠서, 다른 한 쪽은 말이 너무 없어서 의사소통이 이상해졌다! 결론적으로 다이무스는 제 사비를 들여서라도 꽁새 님과의 데이트를 수락할 생각이었다는 걸로~ (^0^)~ 메데타시~ 메데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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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다무. 조각글. 모호.

http://averhaign.tistory.com/23

바레다무. 아이. 이어지는 조각글.

 


 

 #

  "……리키?"
  다이무스는 문을 열고서 비척대며 들어선 히카르도 바레타를 안았다. 정확히는, 바레타는 제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다이무스의 위로 쓰러졌다. 소년은 거대한 그의 몸뚱어리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물음에도 답없이 이어지는 숨이 가빴고 가슴에 맞닿은 남자의 배는 붉은 녹을 토해냈다. 다이무스는 상황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단 한 번도 집을 상처와 함께 들어선 적이 없었다. 소년은 결코 나겁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한사코 자신의 핏자국을 숨겨왔다. 그런 그가 피를 토해내며 돌아왔다. 문득 겁이 밀려왔다.
  "정신 차려."
  내 목소리 들려? 옷의 단추를 풀고 손을 뻗어 상처의 윗부분을 동여맸다. 노골적인 근육조직들이 옷자락 아래서 느리지만 확실하게 재생하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다. 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모지 안심할 수 없었다. 다이무스는 그를 들쳐 업고서 침대 위 굴려 밀었다. 한 번 잘게 움직일 적이면 아물기 시작했던 상처들이 희미하게 찢어져 핏물이 터져나왔다. 벗은 히카르도 바레타의 몸을 응시하며, 다이무스는 그제서야 그가 숨겨왔던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넙다리의 검은 실밥이 여즉 풀리지 못한 채였다. 누더기처럼 기워진 몸에는 자반 또한 그득했다. 맨 처음 밀려온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였다. 머릿속이 써늘하게 식어간다. 근간 자주 앓는 표정을 짓던 그였다. 어디 아파? 아니, 괜찮다, 다이무스.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은 대화를 떠올리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듯 입술이 씰룩였다. 거짓말쟁이. 다이무스는 중얼거리며 식은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냈다.
  드문드문 정신을 차리기는 했으나 히카르도 바레타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자주 앓았다. 어린 다이무스(그는 여전히 성을 받지 못했다)는 축축하게 젖은 물수건을 몇 번이고 쥐어 짜내며 그의 곁을 지켰다. 특별히 바레타가 눈을 뜨기를 바란 것도, 그렇다고 해 그가 숨멎기 바란 것도 아니었다. 굳이 갖다 붙이자면 이기심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홀로 남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어린 소년에게 답지 않게 익숙했고 다이무스는 이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히카르도 바레타의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잘게 기침한다.
  "바레타."
  소년의 입술은 톡톡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붉은 혀가 시계 초침 소리를 내며 억세게 구른다. 그는 천천히 구더기가 들끓는 남자의 귓구멍에 작게 속살댔다.
  "나는 남은 게 없어."
  진정 그러했다. 다이무스에겐 남은 것이 없었다. 애초 가진 것 또한 없었다. 그는 검푸른 체액이 흥건한 시트를 바레타의 아래서 빼냈다. 새로운 시트를 구겨 남자의 밑으로 끼워 넣는 손목에 핏줄이 섰다. 다이무스는 침대 곁의 의자에 걸터 앉아 히카르도 바레타 분의 세상을 눈에 담았다. 소년은 선잠만이 늘었다. 그는 매일 밤 비린내를 묻히고 돌아와 머리를 쓰다듬던 사내가 잠들었으니, 자신이 그 곁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열에 들뜬 얼굴로 바레타는 눈을 떠 다이무스를 찾았다. 소년은 대답했고 그의 손을 잡아주었고 그가 다시 잠들 때까지 퇴행적인 모든 어리광을 들었다. 나는 네가 조금 더 상냥했으면 좋겠어, 네가 조금 더 내 손을 세게 쥐어주면 좋겠어. 단 한 번도 사내에게서 들어보지 못한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이무스는 그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했고 그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어주었다. 그러면 히카르도 바레타는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야, 다이무스는 사내가 찾던 것이 제 음성이, 온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이무스."
  "여기 있어."
  다이무스…… 다이무스…… 홀든. 아.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못했다). 다이무스 홀든. 그렇게 속삭이며 바레타의 손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열쭝이처럼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다이무스는 굳어진 표정으로 그의 손길에 머리카락을 맡겼다. 홀든. 잠든 산의 한복판에 버려진 듯한 기분이 밀려왔다. 홀든…… 히카르도 바레타는 자꾸만 소년을 향해 말했다. 다이무스는 입술을 깨문다. 자꾸만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마침내 대답했다. 그래, 리키. 그러자 바레타가 웃는다.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복해 꺼끌하니 마른 성대를 떨며.
  "……자네는 날 한 번도 리키라 불러준 적이 없었어……"
  까무룩 죽어가는 목소리가 말한다. 바레타의 손을 맞잡았던 제 깍지를 풀어냈다. 다이무스는 수건을 쥐어짜냈다. 사내의 내려온 눈꺼풀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흐르는 것은 없었다. 쪼로록하고, 대야 속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셔츠 위 점점이 방울이 되어 튀어 올랐다. 천천히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며 손바닥에 찬 물기를 털어낸다. 시계가 두어 번 더 돌게 되었던 때서야, 다이무스는 눈을 감을 수 있었다.


#

  바레타는 변색된 손가락을 꼿꼿하게 펴 도드라진 관절을 생각없이 한 번 훑었다. 자주 꾸물텅대던 혈관은 손목으로 이어져 푸르렀다. 한때 그는 손가락 새로 보이는 풍경들을 동경했다.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기도 했다. 그 좁은 틈사구니는 많은 것을 담았다. 얼어붙은 호수와 사람과 마음 따위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을 지워가며 그는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였고 그는 제가 죽는다면 다락 따위에서의 것이라고 상상했다.
  벽지에 그려진 아라베스크의 처음을 찾기 위해 눈을 굴렸다. 여러 개를 겹친 여름 이불이 맨살 위에서 껄끔댔다. 소년이 그를 간병한 모양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얼마나 앓았는지 알 수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눈을 떴을 때 소년이 곁에 없다는 것은 작은 실망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내심 무언가를 기대해왔는지도 몰랐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다이무스?"
  바레타가 멍한 얼굴로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그곳에 있었다. 그는 탁자 위 엎드린, 점점 골격이 잡혀가는 탓에 각이 진 어깨를 보았고 소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늘 굳어져 있었으나 시선만으로 감정을 내뱉어왔는데 지금 만큼은 그같지 않았다. 중국산 자기처럼 허여멀겋게 표백돼 한꺼풀 막이 씌인 듯 낯선 얼굴이었다. 바레타는 침대 아래로 내려서며 한 번 허청였다. 자상들과 내상은 회복되었으나 며칠 간 걷지 못한 탓에 다리가 무거웠다. 그는 소년의 앞에 의자를 빼 앉았다. 다이무스는 여전히 어깨를 탁자 위 납싹 붙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바레타를 바라본다. 이제 괜찮아? 웅얼대는 목소리가 지쳐 있다. 눈그늘이 짙게 내려앉은 얼굴에서 끈적힌 졸음이 느껴졌다.
  "이제 괜찮다."
  조금 자라. 빳빳하게 머리카락이 선 소년의 뒷목을 눌러 재차 엎드리게 만들며 바레타는 대답한다. 다이무스의 고개가 천천히 앞으로 꼬꾸라졌다. 그가 고개를 묻으며 무엇인가를 빠르게 중얼거렸고 그와 동시에 히카르도 바레타의 손은 굳어져 탁자 위로 추락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색색대는 숨소리가 막혀 있던 소년의 목구멍에서부터 터져나왔다.
  ……MERCILESS?

  그 단 한마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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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피다무. 죽음. 블레이드.

#

  안구를 두드리는 빗물에도 더는 반응하지 않게 된 신체였다. 시간이 흐르면 부종처럼 부풀어 올라 뜯어먹히게 될 볼썽사나운 몸뚱어리. 제피는 다이무스 홀든의 머리맡으로 내려 앉았다. 그리고 홀든답게 최소로 줄여놓은 음량으로, 계속해 소리친다. 후퇴해, 후퇴! 후퇴할 타이밍이야! 온기가 남은 홀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피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여느때보다도 멍청하게 누워 척척하게 젖은 옷을 걸친 채…… 그저 그리 있었다. 제피는 그 몸의 온기가 사라져 가는 것을 렌즈 너머로 감지한다. 천천히 날갯짓을 해 그 얼굴 위 그림자를 드리워 빗물을 막아냈다. 이음새 새로 스미우는 빗물에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홀든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리고 불쌍하게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어린 것은 더욱 거세게 소리쳤다. 후퇴해, 후퇴! 삐리릭대는 소리마저 죽여가며 제피는 그를 깨우기 위한 모든 행위를 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발소리와 저와 다이무스의 홀든 위로 그려지는 어두운 그림자에 한 바퀴를 빙 돌며 주변을 시선 속에 담는다. 자그마한 두 손이 제피를 껴안았다. 그 품 속에서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구체에서 이내 불안한 음성이 어그러져 출력된다. 블레이드…… 샬럿은 말 없이 제피의 위로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후퇴할 타이밍이야……

 

#

  날 포맷할 거야? 낭랑한 목소리가 회사의 사무실을 울렸다. 내가 블레이드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건물로 들어선 크루그먼은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조노비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곤란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그 잔망스러운 무기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 죽일 거야? 제피의 그 말에 기어이 마를렌이 울음을 터뜨렸다. 빈 손의 계절이었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손가락 하나를 잃은 것에 가까웠고 회사의 그 누구도 어린 소녀들의 앞에선 홀든의 이름을 언급하지 못했다. 때문에 소녀들이 껴안고 있는 제피에 대해 묵인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네비게이터의 오작동은 치명적이다. 제피는 블레이드라는 키워드에만 대화하게 되었다. 제피와 다이무스 아저씨에 대해 얘기했니? 조노비치의 물음에 실핏줄이 터져 붉게 달아오른 눈으로 샬럿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피가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단 말이에요. 마를렌은 중얼거렸다. 다이무스 아저씨에 대해. 감정을 지닌 기기는 찌꺼기 같은 기억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드렉슬러의 잠자리채를 피하던 제피의 화면에는 언제부턴가 아무 표정도 단어도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희미하게 명멸하던 등으로 미루어보아 오작동은 아니었다. 그저 제피 자신이 거부하는 것이리라. 날 죽일 거야? 제피는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물었다.

 

#

  제피로스, 나와라.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비비며 홀든은 옷가지가 쌓인 바구니를 향해 내뱉었다. 도톰하게 부풀어 있던 바구니 속에서 제피는 안테나를 세우며 마침내 기어나왔다. 블레이드, 대단해! 제피를 찾았어! 그 목소리에 홀든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만약 제피에게 팔이 있었다면 그는 지금쯤 짤박짤박 박수를 치고 있었을테지만, 안타깝게도 제피에게는 샤워를 끝마친 다이무스에게 맥주 한 캔 가져다 줄 수 있는 팔이 없었다. 안테나에 걸려 렌즈를 가린 옷가지를 털어내기 위해 빙글빙글 화급히 돌고 있는 제피에 다이무스 홀든은 손을 뻗었다. 이내 안테나에 걸린 속옷이 바구니 속으로 되돌아갔다. 제피는 거실로 향하는 다이무스의 어깨 위의 위치를 유지하며 재잘댔다. 블레이드, 제피 뽀뽀해도 돼?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질린 얼굴이 화면에 선연했다. 그 표정이 우스꽝스러워 제피는 제 화면에 블레이드의 얼굴을 띄웠다. 그거 무슨 느낌이야? 재밌어? 기계가 못하는 말이 없군. 다이무스의 손바닥이 제피를 소파 밖으로 밀어냈다. 차피 공중에 둥둥 떠 있어 떨어지는 일은 없었으나 제피는 집요했다. 블레이드, 키스는 어떤 느낌이야? 뽀뽀해도 돼? 그거 재밌어? 자꾸만 얼굴 주위를 사납게 맴돌며 깽깽대는 목소리로 외치는 것에 화가 난 듯, 홀든의 두 손이 제피의 양 날개를 붙잡았다. 그는 세척된 제피로스의 액정에 한 번 입술을 눌렀고, 금방 떼어낸 뒤 제피를 탁자 위 얹어두었다. 다시 날아오르리라 생각했던 제피는 날갯짓 없이 얌전했다. 그저 그 액정에 수많은 표정들이 오갔을 따름이다. ‘?!!!’나 ‘o0o’ 따위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홀든은 냉장고로 다가가 맥주를 한 캔 꺼내며 여즉 미동않는 제피를 향해 말했다. 기분 좋나? 웃음기마저 잘게 섞인 듯한 착각이 일었다. 제피는 침울한 표정으로 두둥실 떠올랐고 홀든의 곁으로 다가가 내뱉었다.
  "잘 모르겠어, 블레이드."
  다이무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홀든 또한 키스가 즐거운 일인지는 모른다. 그저 이 상황이 우스꽝스러운 것뿐이었다. 액정에 입술을 댄다 한들 제피는 그 의미도 감촉도 알지 못한다. 다이무스는 빈 캔을 납작하게 우그러뜨린 뒤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삐리릭삐리릭하고 제피의 소음이 귓가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한 번 더 해줘!"

 

#

  Are you gonna white me out? Just because I’m still remembering BLADE? Are you gonna kill me? Are you GOING TO KILL me? Just because I HAVE BLADE? Just because I won't try to let BLADE go?

 

 

 

마지막에서 두번째 '키스는 어떤 느낌이야?'는 티밋 님께서 주신 문장이에요! 그 문장 보자마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는데 그냥 건전하게 끝내기로…… (^-^)…… 제피다무 파주시면 안 될까요?

 

1) 다이무스가 죽고 나서 제피가 다이무스로 인해 오작동을 일으켰으면 좋겠다. 정확히는 조금 더 어그레시브(지금 한국어가 생각이 안 난다 ㅇㅣ런 십얼)하게 바뀌었으면 한다. 본래 제피가 '감정을 가진 기기'로 완성된 이후 사람들은 제피를 대량 생산해 무기로 만들려 했으나 제피를 만든 장인이 모습을 감추었다고. 제피가 진화할 수 있는 유의 기기라면 좋겠다. 제피가 찍찍 반말을 갈기는 이유가 어린아이의 인격이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내뱉는 언사는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알고리즘을 사용한다는 게 제피의 매력 아닐까? 여느 기기가 그렇겠지만.

 

2) 제피가 스스로 무기를 되기 자처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블레이드를 아프게 한 사람들에게 가는 거야? 나도 갈래! 제피도 갈래! 나도! 나도! 그리고 안드로이드 수트에 제피 동기화나 시켰으면 좋겠군…… 기왕이면 실한 남정네로……

 

3) 다이무스의 클론을 마주친 전장의 네비게이터 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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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저다무. 저런.

  두 손과 다리를 결박당한 채 사내는 아무 말도 뱉지 못했다. 그것은 비단 입에 물린 재갈 때문은 아니었다. 벨저는 하얀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으로 다이무스 홀든의 귀 뒤에서부터 턱, 목덜미까지를 쓸어내린다. 그리고 목젖을 가로지르는 선연한 교흔에 검지로 잠시간 작은 원을 덧그리다 한 번 목울대를 짓누르고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오랜 시간 무력하게 늘어져 있던 신체가 평형 감각을 잊은 듯 뇌수가 쏟아졌다. 벨저 홀든이 손을 놓는 순간 금방이라도 넘어가 머리를 박살낼 수 있는 자세였다. 의자의 등받이를 잡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간다. 다이무스의 몸이 크게 한 번 허청인 뒤 균형을 되찾는다. 이제 벨저 홀든은 구둣발로 붕 뜬 의자 다리를 짓누른 채 다이무스 홀든을 바라보고 있었다. 붕 뜬 시선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러나 분노였다. 이지러진 비참을 향신료처럼 곁들인, 고운 빛깔의 감정.

  다이무스 홀든은 벨저의 낮은 웃음을 듣는다. 의자를 짓누른 다리에 힘을 주자 반동처럼 의자는 튕겨오르듯 앞으로 쓰러졌다. 벨저 홀든은 다이무스를 붙잡지 않았고, 딱딱한 시멘트 바닥에 처박힌 이마가 깨질 듯 아파왔다. 금세 뜨끈한 것이 흥건했다. 머릿속의 끈을 튿어낼 듯 비트는 감각에 큭, 하는 침음성을 삼킨다. 벨저 홀든의 손바닥이 다이무스 홀든의 뺨을 후려쳤다. 입 안에 들어찬 공 때문에 이빨이 나갈 것처럼 잇몸 뒤로 밀려난다. 삼키지 못한 타액 위로 붉은 것이 잉크처럼 섞여 흘러나왔다.

  "아, 이런, 실수. 좆처럼 잘 삼키고 있길래 그만 물려놓은 걸 잊어버렸어."

  벨저 홀든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오른 다이무스의 뺨을 어루어 만졌다. 다이무스의 부르튼 입술과 검게 죽은 입가에 그의 하얗고 긴 속눈썹이 닿았다.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린 핏물 탓에 오른쪽 눈을 뜰 수 없었다. 피라니. 벨저는 티 테이블 위를 손으로 더듬어 식어빠진 홍차가 든 잔을 집어든다. 그리고 천천히 잔을 기울여, 다이무스의 머리 위에 들이 부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천천히 눈을 떴다. 찻물에 가라앉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저런."

  단물을 빨아내듯 그 머리카락을 잘근대며 씹으며.

  "화내지 마. 꽃에 물을 준 것뿐이니까."

  벨저가 중얼거렸다. 상냥한 표정이 점차 기색을 감추고 가학적인 미소만이 그의 입가에 남았다. 평생의 원수를 만난 것처럼 악의적인 얼굴이었으나, 하반신에는 열이 올라 있었다. 다이무스 홀든은 마침내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는 어디까지 가나 가늠할 셈평이었을 터다. 저와 같은 성을 공유하는 저 재미없는 남자는 언제나 재보길 즐겼다. 어릴 적부터 누누이 그만 두라 얘기했는데…… 아무래도 학습하기엔 너무 안이하게 대했는지도 모르지. 벨저는 결국 다이무스의 목을 움켜쥐었다. 착하지, 다이무스? 쉿, 앙살 피지만 않으면 더는 때리지 않을게. 예쁘다,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지? 그리 속살대는 목소리는 참도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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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렉다무. 발작.

  새벽 내내 비가 왔다. 점심이 되어가자 빗줄기는 고장난 샤워기의 물줄기처럼 가늘어지다 이내 그쳐버린다. 계속해 비가 내린다면 나가시 않을 셈평이었기에 드렉슬러는 입을 다셨다. 1.5파운드짜리 비닐 우산―던적스럽게 그를 엿먹이곤 했던 비를 떠올리며―을 꺼내 쥐고 그는 카펫의 솔을 꾹꾹 갈라진 나무 타일의 틈사구니로 밀어 넣으며 구름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았다. 먹먹했다. 그의 몸 또한 이 좁은 방구석의 일부분이 되어 습기를 머금고 깊은 곳에서부터 삐걱이고 있었다. 누군가 제 등의 나사를 거꾸로 돌려낸 것 같았다. 그의 생각도, 휠체어의 바퀴도 요철을 떠나 같은 곳을 헛돌았다. 그의 인생의 10분의 1도 알지 못하는 학장이 경고한 것처럼, 그는 망가져 가고 있는 권태기의 벨트 위에서 멍청하게 달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망가진 장난감 병정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언젠가 이 모든 우주에서 도태되어 검은 톱니바퀴에 뼈가 으스러져 뒈질 것이다.
  머뭇거린 것이 무색하그로 현관은 허히 비어 있었다. 그곳에서 다이무스 홀든을 본다. 미간을 엷게 찌푸리며 사포로 긁힌 신발 밑창을 들춰보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잔을 깨뜨린 어린 아이처럼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걷지 못하게 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다. 신발이 닳을 일도, 신발이 닳을 일을 할 수도 이젠 없었다.
  누군가 알아차려주기를 바라 자꾸만 신발끈을 풀었던 어릴 적을 기억한다.
  현실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매끈한 밑창을 사포로 긁어대던 저를 또한 떠올릴 수 있었다.
  홀든을 바라본다. 손을 뻗지도, 제 말을 듣는 것 같지도 않은 홀든을. 시선을 피하며 신발장을 열어 새 것처럼 반질반질한 구두를 꺼냈다. 가장 오래 되었지만, 가장 새 것같은 구두였다. 신발장의 구두들은 언제나 새 것처럼 반질반질하다. 학장은 드렉슬러에게 망가짐을 단언하고선 이후 변명하듯 그에게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 얘기했다. 분한 일이었으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는 언제나 괜찮아야만 했다.
  "걸을 수 없지만 걷고 싶어하지 않는 건 아니다, 멍청아."
  눈 깔아. 변명하듯 내뱉었다. 홀든은 고개를 끄덕인다. 드렉슬러는 허리를 숙여 두 손으로 신발 뒤축을 늘여 발을 꿰어 넣었다. 너는 없으면서 잘도 있는 척을 해. 원망 섞인 목소리에 홀든이 작게 웃었다. 그리고 이내 흩어져 머릿속으로 먼지처럼 사라졌다.
  휠체어의 손잡이에 걸어둔 우산은 길바닥 이곳저곳을 두들겼다. 빗줄기만이 그쳤다 뿐, 바닥은 여즉 끔찍스럽게 젖어 있었다. 가을의 테를 벗어 던지려 드는 나무들이 회랑의 기둥처럼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누렇게 물든 낙엽들은 거절당한 손수건처럼 나뒹굴었고 스산하게 몸을 치댔다. 흔해빠진 불쌍한 인간들 중 한 명이 되어 다리오 드렉슬러는 코트를 여민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밖으로 걸음을 옮겼는지 알 수 없었다. 휠체어의 뒷주머니로 손을 뻗자 두루말이 휴지와 플라네타륨, 그리고 레이저 포인터가 손에 잡혔다. 우습지도 않다.
  그는 먼 거리를 움직여 카페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먼 거리로 향하던 도중 카페로 움직였다. 언젠가 홀든이 제 손에 쥐여주던 종이 커피잔의 상표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제가 충동적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학교 앞 여느 곳에나 있을 법한 싸구려 카페에는 방향제 같은 커피향이 둥둥 떠다녔다. 종업원들은 그를 신경쓰지 않았고, 드렉슬러는 아무 테이블의 의자를 옆으로 밀어내고 휠체어를 갖다대 앉았다. 그는 메뉴판에서 가장 이름이 긴 무언가를 두 개 시켰다. 그는 그 낯간지러운 외계어들을 말하며 손톱 밑에 끼인 때를 바늘로 긁어 빼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몇 번이나 버벅대며 그 단어들을 잘못 말했다. 주문을 받던 종업원이 결국 그의 말을 자르고 메뉴를 되물었고 다리오 드렉슬러는 백치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다.
  무스 케이크 위의 젤라틴을 포크로 걷어냈다. 네가 조금 더 강해져야 할텐데. 마법 같은 문장을 떠올렸다. 너. 네가 조금 더. 강해져야 할텐데. 주체 없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흩날리는 전단지 같았다. 드렉슬러는 시뻘건 젤라틴이 덕지덕지 발린 포크를 옆으로 밀쳐낸 의자에 앉은 홀든의 앞에 흔들어보았다. 먹어볼래? 홀든이 고개를 저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포크를 접시에 긁어 젤라틴을 닦아냈다. 그 구석진 자리서 한 눈에 봐도 퍽퍽해 뵈는 시트에 네 개의, 여덟 개의 구멍을 만들며 그는 턱을 괸다.
  "휴직했다."
  다이무스 홀든이 그 말을 듣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외출을 하는데 네가 보일지는 몰랐고…… 그나저나 오랜만이네."
  커피잔 위에는 허연 우유 거품이 그득했다. 드렉슬러는 눈을 살짝 들어 홀든의 옆모습을 훔쳐 보았고 스폰지처럼 구멍을 뚫은 케이크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에서 반지를 낀 홀든의 하얀 손가락이 무엇인가를 연주하듯 간헐적인 소음을 만들어냈다. 반사적으로 그의 옆으로 휠체어를 조금 더 붙이기 위해 휠체어의 휠을 쥐었다. 그러자 눈 앞으로 무엇인가가 들이밀어졌다. 손수건이었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
  드렉슬러는 천천히 고개를 저어 홀든의 손을 거절했다.
  "너는 차피 여기 없잖나."
  입밖으로 내뱉자 조금 더 확실해진다. 드렉슬러는 제 손에 들린 손수건을 휠체어의 뒷주머니로 던져 넣었고 은빛 반지를 낀 손가락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지했고 케이크가 더럽게 맛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이무스 홀든, 씨발 새끼. 잘게 웃던 그는 식어빠진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환상같은 메탄올이다(그는 자주 상상했다). 하기사 그는 다리를 잃지 않았더라면 눈이라도 멀기 위해 발작했을런지도 몰랐다. 육신은 관이되 세계는 또다른 관이었다. 그는 몽조의 한 켠에 저를 수용시킴에 있어 거리낌이 없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잔이 카페의 타일 바닥 위로 떨어져 깨졌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표정의 변화 없이 그것을 내려다본다. 허공에 여전히 잔을 쥐고 있는 양 살짝 안으로 말려들어간 검지와 중지를 그리고 다시 바라본다. 그는 천천히 제 주머니 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유리로 된 앙증스러운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자그마한 알약들을 입 속에 털어넣었다. 물없이 턱을 비틀어 씹어내자 녹은 플라스틱 같은 맛이 지독했다.
  빨대를 가져다 주겠어, 홀든? 그는 카페의 입구에서 자신을 감흥없이 응시하는 다이무스에게 말했다. 손님, 괜찮으세요? 종업원의 물음에 허허로이 웃으며. 다리오 드렉슬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자주 이러거든. 들뜬 머리로 생각하기에도 이것은 이상했다. 홀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밀랍인형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감정을 거세당한 것 같았다. 드렉슬러는 레이저 포인터로 기하학적인 문양이 빼곡한 카페의 천장을 가리켰다. 집중해, 다이무스 홀든, 나에게 집중하라고. 종업원의, 점자척으로 겁에 질려가는 목소리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다리오 드렉슬러는 다이무스 홀든의 이마에서 콧등으로, 콧등에서 입술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일어 서 걸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충동적으로 팔에 힘을 줘 휠체어에서 가까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다리를 들어 땅 위로 옮기자 거세게 세상이 흔들렸다. 홀든의 손이 다리오 드렉슬러의 무릎에 닿았다. 드렉슬러, 그만. 그리 내뱉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드렉슬러는 폐를 들어낼 듯 자지러지게 웃는다. 들었습니까? 이 매정한 연인이 지껄이는 말을 누가 좀 들어봐! 불구하고 그 말이 그의 입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깨진 도기 파편이 그의 뺨을 찢었고, 앙상한 가지 같은 두 다리를 덮은 바짓단만이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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