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다무. 미카엘.

  인간이 가장 끔찍해질 수 있는 세월이었습니다. 6년의 길다면 긴 그 시간이 흘렀을 때엔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언젠가 몸을 뉘였던 잔디밭엔 면류관을 길게 접해놓은 듯한 철조망이 장미덤불처럼 완연했고 붉은 녹이 화엽처럼 피었습니다. 그 잔디밭 위 뛰놀던 어린 아이들은 이미 머리가 굵어 제 한 걸음조차 사리며 살아가게 된 지가 오래였습니다. 키가 반으로 줄어든 청년이 섪게 하이얀 커튼이 내려간 약혼녀의 창문을 바라보고 총 한 번 쥐지 못해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이들이 죄인이 되는 것은 흔해빠진 풍경이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듯, 혹은 되려 물레 바늘에 찔려 불가항력의 꿈에 빠져들듯 급작스럽게 자신을 되찾았습니다. 그들이 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밀어낸 단어들은 보도 블럭 위의 구정물이 되어 자동차 바퀴에 의해 흩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행인들의 바짓단에는 전쟁 전의 편안했던 삶을 갈구하는 죄악적인 외침이 검게 묻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찌꺼기들을 수여했으나 그들처럼 버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제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그것을 알려줄 노인 또한 백골이 되어버린지 오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인이요? 나는 물었다.)

(남자가 긍정했다. 그러나 더 설명하지는 않았다.)

(나는 최대한 침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후추를 먹어도 눈물이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농담은 썰렁했으나 분위기는 일세되었다.)

(그는 만족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저는 그를 만났습니다.


(그는 잠시간 뜸들였다.)


  그는 신의 첫 번째 피조물이었습니다.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먹지도 자지도 웃지도 숨쉬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우는 일조차 없었습니다. 그의 가슴에 귀를 대본 적도 그의 목에 손을 짚어본 적도 없었으나 심장이 없는 것만은 틀림없었습니다. 저는 반쯤 확신에 차 그의 손목을 쥐어보려 손을 뻗었으나 그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양 한 걸음을 물러섰습니다. 저는 약간의 우울과 약간의 분을 느끼며 지끈대는 미간을 눌러 문질렀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좋지 않으리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그 직감은 이내 확신으로 변했고 저는 그날 이후 그에게 닿기 위해 노력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그는 가끔 제 곁에 앉아 꼭 장례 예배를 치르는 목사님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 보았습니다. 그건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굳이 비유를 해야만 한다면 제가 관짝에 처박혀 신의 축복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신체의 말단이 썩어가고는데 누군가 제게 구원을 약속한 기분이었습니다. 기뻐야만했는데 기쁘지 못했습니다. 제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 그는 조금 아픈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는 더 자주 찌푸리게 되었고 그는 더 아파했습니다. 저는 그를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잠시만 물을 마셔도 괜찮을까요? 남자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게 물잔을 건넸다. 그가 멋쩍게, 그러나 당혹스럽게 웃었다.)

(그는 나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하지 않았다. 잠시 일어나 내가 보이지 않는 어딘가로 가고 싶어한 것 같았다.)

(입술을 찡긋대며 나는 복도에 비치된 절수용 식수대가 고장났다는 사실을 그에게 어떻게 알려야 핑계처럼 들리지 않을까를 고민했다. 그는 그러나 물을 마셨고 입술을 한 번 핥은 위 자신의 베레모를 매만졌다. 그의 손톱은 세로결이 일어나 어울리지 않게 거칠었다.)

(그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자주 장례식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런 일들은 이 끔찍했던 세월이 제게 남긴 값진 경험들 중 하나가 될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저는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들의 목록을 만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한 사람을 적는 것도 힘에 겨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시체들은 그들의 목록에 제 이름 올리기를 작당한 것 같았고 저는 한 달 내내 검은 양복을 빼입은 채 마트료시카처럼 알맹이를 감추고 오열이 흐르는 비석 앞에 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혹은, 어쩌면 저는 불청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은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지 못했을테니까요. 아마 제 이름은 산 자들에 의해 짜집기되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날이 흐렸고 그 중 반절은 비가 내렸습니다. 사람들이 꼭 장례를 치르기 위한 날을 골라 죽은 것 같았습니다. 우중충했습니다. 밝아선 안 된다는 강박에 걸린 것처럼. 그러던 어느날, 저는 사무적인 관계였던 한 사내의 장례식에 가게 되었고 거기서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남자는 불안에 차 있었습니다. 남자는 지금 관에 들어가 죽어있는 사내의 새끼 손가락을 잘라 계집애처럼 제 목에 걸고 있었거든요. 누군가 알아차리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면서도 그는 그 손가락을 돌려놓거나 자신의 몸에서 떼어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예배 내내 관을 뚫어져라 응시했습니다.

  그는 사내의 동생이었습니다. 저는 예배 도중 한 번 웃고 말았는데 목을 가다듬듯 억지스러운 소음을 내야만 했습니다. 제가 쿨럭이자 사람들은 한 번 제게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저마다의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그 이후로 관 대신 계속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웃어버린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죄책감은 들지 않았지만 그가 다른 이들에게 그것을 말할까 걱정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쩌겠나요. 소문이 싸구려 전단지처럼 돌면 저는 그 교훈적인 경험, 그러니까 장례식들을 더는 겪을 수 없게 될뿐이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남자는 관 앞에 남았습니다. 그는 카네이션을 두 송이 눈물처럼 흩뿌렸습니다. 비가 계속해 내렸으나 누구도 그에게 돌아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갈이 구르는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왔습니다. 남자는 저를 응시했습니다. 저는 그의 목에 걸린 작은 이빨주머니를 바라보다 뒤돌았습니다. 남자가 생각했습니다: 위선자 챌피, 적대자 챌피.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남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건 그의 간악한 머리로 떠올리기엔 너무 시적인 단어들이었습니다.


(그가 눈을 감았다. 그는 쿨럭이고 있었다.)

(잠시, 잠시만요. 다른 얘기를 해볼까합니다. 그의 말에 나는 그에게 다른 이야기를 해달라 부탁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고 용두를 돌렸다. 이제 와선 구식이죠? 그의 말에 나는 멋지네요, 하고 대답했다.)


  시기가 시기였습니다. 반딧불로 생을 조롱하던 사내의 하얀 방엔 고통에 겨운 병인들의 신음이 그득했고 사람들은 서로의 불행을 비교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했으나 죽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가장 치명적이지 못한 것들을 잃은 자들은 그 속에서 침묵해야만 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저는 제 심장의 일부를 도려내 싼 값에 팔아치우고 싶었습니다.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한숨도 사라졌습니다. 저는 태어나 가장 완벽한 상태에 있었고 그것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딱히 누구에게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유의 감정이었습니다. 진실로 비참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매일같이 그렇게 눈을 떴습니다. 그가 보였습니다. 그의 시선이 저를 전반사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의 눈 속으로 들어가지도 그의 시선으로부터 튕겨나오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그의 얼굴만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제 기억보다도 더없이 희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그를 제한 방문객들은 없었습니다. 저는 한결같은 곳에서 한결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모두 죽어버렸든지 모두 죽고 싶었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 제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런 제 표정을 이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기민해진 것인지 모를 남자가 제 이마에 손을 짚었고 길어버려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쓸어넘겨주었습니다. 맨질한 이마에 닿은 손은 꼭 공기 같아서 축축한 수건의 서늘한 기운만을 안겨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그의 아린 먼짓빛 홍채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계기는 사소했습니다. 저는 그를 본 기억이 있었습니다. 어째서 그제야 떠올랐을까 싶었을 정도로 각인은 강렬했습니다. 저는 합리적이었던 남자에 대해 떠올렸습니다. 얼핏 사내가 그와 닮은 것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입밖으로 내는 것은 스스로에게 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때문에 그를 이해할 수 있는 척했습니다. 저는 그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고 그는 꼭 들어선 안 될 욕설을 들은 양, 이전에 제가 그를 거머쥐려 들었던 때처럼 다시금 물러섰습니다.

  아.

  저는 보았습니다. 그를요. 그의 등에 달린 날개를요. 천사같았죠. 그는 천사일 수 없었으니 꼭 천사같았습니다. 그건 공작 시간에 하얀 종이를 엮어 만든 듯한 신체 기관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날개뼈가 어째서 퇴화되지 못했을까에 대해 상상했습니다. 공상은 끊임없는 가지처럼 육속했습니다. 제가 죽었나요? 저는 물었고 사내가 고개를 저었습니다. 제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토록 유감스러울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어째서 천사를 보고 있는 거죠? 저는 화가 났고 기습적으로 손을 뻗어 사내의 뺨에 갖다댔습니다. 정확히는 갖다대려 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손은 아무것도 쥐지 못했습니다. 무척 거세게 팔을 내뻗었기에 그대로였다면 저는 아마 사내의 따귀를 때렸을 것입니다만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결국 제 손바닥은 다시 한 번 비어버렸으니까요.

  저는 처음으로 그의 감정을 보았습니다. 성대를 거세당한 양 아무 말도 않던 이가 제게 표정을 드러냈습니다. 당혹도 놀라움도 아닌 서글픔이었습니다. 검은 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유의 폐기물이었습니다.


(그가 파스스 웃었다.)


  세상에. 어째서 제가 그를 잊을 수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저는 제가 보았던 행인들이 깨어나듯 깨어났습니다. 물레 바늘은 저의 손가락을 찌르는 대신 목을 꿰뚫어 숨구멍을 틔웠고 보글보글 고인 피들이 검은 구멍으로 끓어나왔습니다. 저는 꺽꺽대며 목을 젖혔습니다. 돌이켜 보노라면 제가 그에게 욕정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들이마시고 먹어치우던 행복을 가장 노골적인 형태로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현재가 고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는 언제든 기다릴 수 있었으나 이것은 어린 아이에게 마시멜로를 쥐여준 뒤 먹지 말 것을 이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손발이 떨렸고 어금니 안 침이 고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죽었나요? 저는 물었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의 장례식에 갔었죠. 요즘 건망증이 심해졌나봐요. 말을 내뱉을수록 저는 분시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이 모든 일들을 잊고 싶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아무래도 큰 착각이었던 모양이었습니다. 하나 둘 잊기 위해 발악했던 파노라마가 제 귀를 파고들었습니다. 저는 한없이 작아졌고 동시에 한없이 식어들어가 단단해졌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많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저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감정들이었습니다.

  그는 저를 내동댕이쳤습니다. 저는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의 시체를 수습했던 것이 누구였던가요. 모자를 눌러 쓴 젊은 청년이었던가요, 더는 들려오지 않는 소리들을 찾아 그의 배를 가르고 심장을 가르고 머리를 쪼개 섭식하던 괴물이었나요. 저는 목소리가 어디서부터 피어나는 꽃인지 알지 못한 채 평생 짧은 생을 보냈습니다.




미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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